(2786)제68화개헌축사 사사오입개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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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54년의 「5·20」선거는 처음부터 개헌문제가 주요「이슈」로 등장했다. 자유당은 도처에서 『개헌만이 살길이다』고 외쳤고 민국당을 포함한 야당쪽 후보들은 『그리되면 독재가 된다』고 맞섰다.
자유당은 전국적인 규모로 개헌추진국민대회를 열어 5개항의 개헌안을 국민의 이름으로 지지한다고 내세웠다.
5개항 개헌안은 ①대통령의 3선제한조항 철폐 ③국민투표제 ③선거민에게 국회의원 소환권 부여 ④정부에 민의원해산권 ⑤경제조항의 개정등이다.
이에 대해 민국당은 총선과 개헌을 결부시키는 것은 자유분위기를 파괴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시정되지 않으면 선거를 「보이콧」할지도 모른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박사는 『입후보를 취소할지도 모른다고 공포해놓고도 선거에 들어간다면 이것은 대한민국의 한 정당으로서 있을수 없는 일이며 또 이런 몰상식한 일을 해서는 민중의 신망을 얻을수 없을것』이라고 야당을 반박했다.
이 선거에서 당한 야당후보의 탄압을 나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겠다.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직선 주장에 반대하였다하여 2대국회의원 선거때 김도연 김준연 김상돈 조한백 이정내, 그리고 나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낙선시킨 정부가 3대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요주의 인몰」에 탄압을 가했다.
나는 족청영광군단장으로 제헌때 무투표 당선됐다. 또 한민당 창당「멤버」로서 특별히 이대통령과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그러던 내가 정부의 눈에 벗어난 것은 제헌의회서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면서부터다.
나는 이대통령이 초대대통령취임식때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라고 된 헌법의 선서조항을 『나 이승만은…』이라고 말할때부터 어렴풋이 무언가 불안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제헌기간동안 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서명날인을 받으러 다녔고 그때문에 이범석총리와도 사이가 나빴었다.
나를 눈의 가시로 본 이박사는 영광군 족청부단장이었던 정헌조씨를 2대총선때 자유당공천을 주어 나와 대결케 했다.
정부는 모든 당권을 동원해 정씨를 도왔고 심지어 나의 호위경관 김창집과 선거사무장 강대흥을 출마시켜 유세강마다에서 나를 욕하게 했다.
역부족으로 나는 2대에서 낙선했다. 그럼에도 나는 고향에서 병원을 열고 꾸준히 기반을 다졌다.
3대선거때도 나에 대한 탄압은 마찬가지였다. 탄압이 가해올수록 더욱 독해졌다. 어느새 「코브라」라느니 「독설가」라느니 「깡통」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물론 이런 탄압을 나만 받은 것은 아니다. 전국 각처에서 경찰의 「몽둥이선거」라는 비난이 공공연했다.
나의 선거운동원이 무려 1천6백명이나 경찰에 환문당했고 목포형무소에 46명이 수감됐다. 경찰은 투표일 닷새를 남겨놓고 나를 연금했다. 집사람이 매일 경찰서로 면회를 와 선거전략을 바깥으로 전달했다.
그런데 투표일 3일을 앞두고 「유엔」선거감시위원단의 호주대표가 영광엘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집사람이 하루종일 군청앞에서 기다리다 노상에서 호주대표를 만나는데 성공했다. 집사람은 숙명여전 출신으로 몇마디 영어를 할줄 알았다. 급하면 통한다고 집사람이 손짓 발짓 섞어가며 호소한 것이 호주대표를 움직였다. 남편의 억울한 처지를 털어논 집사람은 호주대표를 끌고 경찰서로 왔다. 호주대표는 내심 『이런 시골에 어찌 영어를 하는 부인이 있느냐』는듯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경찰서장실에서 호주대표를 만나 관권개입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내가 영어로 말을 하니까 영어를 못알아듣는 경찰서장이 자꾸 우리말로 하고 통역을 대라고 눈을 부라렸다.
양측 얘기를 다 들은 호주대표는 경찰서장에게 『투표 끝날때까지 조씨를 억류하지 말라』고 했고 나에게는 『위법사실이 있으면 선거후 법에 따라 처벌받을 각오를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중재사실을 감시위원단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그날로 나는 풀려나 『조영규 여기 나왔소』고 외치며 밤낮으로 유세를 했고 결과는 2만6천8백표 차이로 자유당의 정헌조후보를 눌렀다.
나보다도 신익희씨등이 당한 수난은 몇배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뒤에 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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