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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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요즘은 대학가의 축제 행사에도 농악이 등장해 흥을 돋운다. 징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며 장구와 북소리에 맞추어 덩실대는 품이 오히려 젊음의 패기와 약동을 느끼게 한다.
농악의 「리듬」은 우선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음도 고저보다는 장단에 더 능하다. 사뭇 원시 음악의 여운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스타일」과 「델리커시」와 「테크닉」을 척도로 삼는 오늘의 감각에 식상한 사람들에겐 도리어 농악은 신선한 감흥을 주는 것도 같다.
농악의 유래는 전거로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농사에 종사한 것은 삼국시대 이전부터라고 한다. 농사꾼들은 농번기면 무리를 지어 일터로 나간다. 바로 그 「두레」의 음악이 농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삼국시대에는 5월 파종과 10월의 농공필후엔 선남선녀들이 한데 모여 제천의식을 갖고 가무음주를 했다는 옛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가무를 특히 즐겼던 것 같다.백결선생 (신라)의 『방아타령』까지 있는 것을 보면 속악이 상당히 유행했던 모양이다.
고려가요로 전하는 「사리화」 같은 농부가는 세금과 관의 수탈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심정을 노래로 읊고 있다.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는 것에 비유한 사설이 그럴듯하다. 세종대왕 때는 민속 음악을 장려까지 했었다.
농악은 흔히 「사당패 농악」과 「농민 농악」으로 나뉘어진다. 「사당패 농악」은 민속적인 곡예를 위주로 하고 있어 직업적인 분위기가 짙다. 그러나 「농민 농악」은 이를테면「아마추어」의 음악으로, 누구나 뛰어들 수 있다. 그야말로 장삼이사도 징을 울리고 북을 치는 것이다.
삼천포 지방의 농악은 벌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다.
남도 농악의 경우는 영남 지방과는 또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고깔 등 농악대의 복장이 우선 화려하고 음악적으로도 세련되어 있다. 전북 임실이나 정읍의 농악은 그 대표적인 예다. 필경은 판소리의 전통이 스며 있는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영남에서는 볼 수 없는 무동 같은 것도 있다.
그러나 어느 지방의 농악이 더 뛰어나고 말고는 없다. 저마다 특색이 있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도 하다.
유형문화재는 문자 그대로 모양이라도 남아 있지만, 무형의 경우는 사라지면 그만이다.
농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요즘 전남도에서 진도의 소포 마을을 농악 보존 마을로 지정했다. 섬 지방 특유의 때묻지 않은 농악일 것 같아 한번 들어보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된다.
공자는 음악을 두고 『성어악』이라고 했다. 음악으로 인격을 쌓는다는 뜻이리라. 우리 민족도 좋은 옛가락을 통해 의연한 마음을 가져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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