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동<서강대 교수·국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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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항하고 나선 우리 민족의 결집된 민중시위였다.
경술합신 이후 가혹했던 일본의 무단정치에 도전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한 거족적인 저항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비록 이 시위운동은 일본관헌의 무자비한 대응책으로 수많은 인명살상과 재산피해를 내고 민족자결의 원칙을 관철하지는 못했으나 그 충격은 쌍방 간에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일본의 위정자들은 무단정치만으로는 식민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고 「문화통치」라는 위장된 자유정책을 표방하여 우리 민족을 회유하려는 고도의 식민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의 경우도 국권을 쟁취하지 못하고 실패한 시위운동이었으나, 전 민족이 합치된 강렬한 저항정신으로 일제의 학정을 세계에 폭로했고, 내적으로는 자체의 응결된 힘을 실증해 보여준 데에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거족적인 민중운동은 자아실현의 전환점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힘입어 위장된 일본의 식민정책을 알면서도 민족자체의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대전제를 앞세워 그 정책을 따르게된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 우리의 민중운동이 보인 저항의 한계성을 드러낸 것으로 문화적인 차원에서 변혁을 기도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언론 자유화의 일환으로 민간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과 「개벽」 「서광」 「폐허」 등 각종 잡지의 출간을 들 수 있다.『일대광명을 견하고 이천 만민상이 군신ㅇ력으로 자유의 도정을 건행코자 한다』는 「동아일보」 창간사의 일절과도 같이, 이 민중운동으로 우리는 비록 좁지만 삶을 위한 자유의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민족문화의 진흥책으로 사립학교와 강습소 등이 다수히 설립된 것이다.
이들 교육기관의 속출은 국권쟁취를 위한 민족적 저력을 구축하려는 의도의 반영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민족어의 자각과 본격적 근대문학이 확립된 점이다. 3·1운동 직후 문학운동은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양대 진영으로 갈려 그들의 대립 갈등은 양극화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두 세력은 원래 민족주의의 한 태내에서 분화한 급진과 온건의 차이일 뿐이며 그 구심점은 민족해방에다 두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3·1운동은 정치적으로 실패하여 국권을 쟁취하지 못한 거족적인 민중시위였지만, 그것이 미친 영향은 자못 컸었다. 국권회복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과 그에 못지 않게 외세에 대항하려는 자체의 역량을 구축하기 위해 근대화운동을 촉진시킨 탓이다.
봉건적인 인습과 고각에서 탈피하여 서구의 신문화를 과감히 수용하고 우리 민족에게 신생의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그 뒤를 이어 온 민중운동과 학생운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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