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On Sunday

진실보다 높은 불신의 벽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A변호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뭔가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뜻이다. 손가락 사이의 담배는 푸른 연기를 피워 올리며 하얀 재로 변해갔다.

“유령 같아요. 보이진 않는데 누군가는 존재를 믿는…”

지난해 봄, A변호사는 오랜 공직을 떠나 고향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모처럼의 저녁자리에서 그는 현직에 있을 때만큼이나 유쾌했다. 구수한 사투리가 섞인 입담도 여전했다. 그의 표정이 굳어진 건 누군가 무심코 던진 질문을 듣고서였다.

“그래, 향판(鄕判)들 위세가 실제로도 대단합디까.”

그가 술 한 잔을 들이킨 뒤 말을 이었다.

“진실보다 높은 건 ‘불신’의 벽이겠죠. 누군가는 있다고 믿고, 누군가는 통한다고 생각합디다. 그게 더 무서운 것 같아요.”

지난해 3월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역법관(향판)의 폐해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년에 1000명이나 되는 법관이 전국 순환근무를 합니다. 제가 인사권자지만 원시적인 제도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울집중 현상에 모두 서울에서 근무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보니 그렇습니다. 업무 담당자가 자꾸 바뀌니까 소송이 자꾸 지연되고, 지역사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재판하게 되면 지역사회의 감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합니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비리) 지역법관 때문에 성실하게 일하는 모든 지역법관의 명예에 상처를 줘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 기사가 회자될 때마다 사기가 떨어지지 않게 특별히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대법원은 최근 지역법관제도를 폐지할 뜻을 밝혔다. 2004년 도입된 지 10년 만이다. 같은 지역 근무 희망이 계속 받아들여진 ‘비공식 향판’이 과거에도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사법부의 인사제도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다.

잇단 추문 속에서도 대법원은 최근까지 ‘일부 개인의 잘못’이라며 지역법관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2월 교비를 횡령한 이홍하 서남대 이사장에 대한 보석허가 논란에 이어 3월 허재호 대주그룹 회장에 내린 일당 5억원 짜리 ‘황제노역’ 판결이 여론의 뭇매를 맞자 백기를 들었다.

향판과 향판 출신 변호사들의 ‘커넥션’은 분명 과장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A변호사의 말처럼 진실보다 높은 건 불신의 벽이다. 판사들만 탓할 순 없을지 몰라도 그 벽을 쌓아 올린 책임에서 그들이 결코 자유로울 순 없다.

제도를 없앤다 하여 불신의 벽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올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절망의 재판소(絶望の裁判所)’ 저자 세기 히로시 메이지대 교수는 일본의 판사들을 일컬어 ‘정신적 수용소 군도의 수감자들’이라고 했다.

과연 우리 사법부는 어떠한가. 정의의 최후 보루가 돼야 할 사법부, 판사들이 ‘불신의 벽’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이동현 사회부문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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