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 속으로] 눈치 100단 까막눈 여인, 모사드에 똥침 놓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놈베코는 빈민촌에서 분뇨통을 나르다 글을 배우고, 핵폭탄을 개발하는 연구소에 들어간다. 놈베코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그림으로 정리했다. [그림 열린책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544쪽, 1만4800원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단숨에 읽게 되는 소설이다. 흥미로운 캐릭터, 기상천외한 사건, 강도 높은 유머 등 ‘오락 소설’이 갖춰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추고 있다. 싱거운 개그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의 뼈대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내, 어느 정도 실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실주의 소설의 규율에 부자연스럽게 얽매이는 것도 아니다. 있을 수 있을 법한 사건을 소설 속에 그린다는 ‘개연성의 원칙’ 쯤은 훌쩍 뛰어넘는다.

 가령 헬기를 타고가다 600m 상공에서 시속 245㎞의 속도로 추락한 등장인물 중 하나가 낡아 빠진 창고 지붕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살아나는 식이다. 그야말로 만화 같은 설정이지만 만화보다 더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우리 주변, 지구촌 곳곳을 떠올리면 저자의 허풍과 과장을 마냥 실없다고 탓할 일만도 아니다. ‘모름지기 예술은 이래야∼’ 같은 류의 엄숙주의적 태도를 잠시 접어두면 독자의 눈앞에서 북유럽 특급, 소설 롤러코스터는 흥미진진하게 굴러간다.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

 소설은 일종의 연대기다. 1960년대 초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흑인 소녀 놈베코 마예키가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즉 타이틀 롤이다. 그가 우여곡절 끝에 스웨덴으로 이주해 사랑도 얻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하는 해피 엔딩 스토리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 동력은 남아공 핵무기 개발자들의 어이 없는 실수로 만들어진 3메가t 규모 원자폭탄의 향방. 폭탄 리스트에서 빠져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폭의 처리를 둘러싸고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 요원, 스웨덴의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과대망상 공화주의자, 중국의 국가 원수 후진타오 등이 차례로 불려나와 국제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소동을 벌인다.

 놈베코는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자신에게 허튼 수작을 벌이는 늙다리 호색한의 양쪽 허벅지에 가위를 깊숙이 박아줄 만큼 강단이 있는 데다 수리 연산 능력이 천재적이다. 눈치 100단이어서 난마처럼 얽힌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절묘하게 찾아내 원폭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외모는 빼어나지 않아도(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뭇 남성 뺨치는 재주꾼이라는 점에서 저자와 같은 스웨덴 출신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작품 『밀레니엄』의 여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연상시킨다. 매력적인 여성에 관한 한 스웨덴 남성 작가들은 공통 기호라도 있는 것일까.

 소설 속 명장면을 여럿 꼽을 수 있겠지만 작품 후반부 스웨덴 국왕과 수상, 모사드 요원, 놈베코, 사고뭉치 쌍둥이 형제 등이 연출하는 ‘다자 대면’ 대목을 꼽고 싶다. 따로 떼어내 별도의 희극을 만들어도 될 만큼 웃음 농도가 진하다. 원자폭탄이 들어 있는 상자 위에서 놈베코와 홀예르가 거푸 사랑을 나누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스릴과 흥분의 강도에 대한 야릇한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기자·사업가로 활동하던 저자는 “첫 소설에 감히 도전할 만큼 성숙했다”고 선언하며 스위스로 이주해 40대 후반에 쓴 첫 장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전세계적으로 80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번 소설은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한국의 창작 토양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신데렐라 스토리다. 그런 벼락 성공 스토리가 이번 소설의 황당무계함을 덜어주는지도 모르겠다.

[S BOX] 영화로 히트친 요나손 첫 소설 『… 100세 노인』 ?

요나스 요나손의 첫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열린책들)은 소설이 히트하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최근 국내 개봉해 인기를 끈 까닭에 원작 소설도 현재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다.

 역시 개성적인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1905년 태어나 소설 속 현재 시점인 2005년 100세가 된 알란 칼손이 주인공이다. 그는 소싯적에 내전이 벌어진 스페인에서 독재자 프랑코 총통과 조우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핵폭탄 개발을 돕는 등 나름 한 가닥 한 인물이다.

 그런 이력에 걸맞게 슬리퍼를 신은 채 무료한 양로원을 탈출했다가 우연히 갱단의 돈가방을 훔치게 된다. 가방 안에서 자그마치 5000만 크로나(약 75억원)의 현금 뭉치가 발견되면서 소설은 반드시 돈을 되찾아야 하는 갱단과 반드시 그들을 따돌려야 살 수 있는 노인의 떠들썩한 추격전이 된다. 실수로 추격자를 냉동실에 가뒀다가 얼려 죽이는 등 코믹한 설정이 잇따른다.

신준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