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문화재의 도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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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보 10호인 실상사 백장암(전북 남원군 산내면 소재)의 3층 석탑과 보물 40호 석등이 호리꾼들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허물어졌다. 현존하는 신라후기의 석탑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걸작품으로 꼽히는 이 3층 석탑이 산산조각이 나 돌무더기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이란 긍지가 갈기갈기 찢기운 것만 같아 한편 부끄럽고 한편 섬뜩하기조차 하다.
호리꾼들은 72년 1층 옥개석 보수를 위해 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2개의 사리를 포함한 유물들을 봉안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이를 도굴하려고 암자로부터 70m가량 떨어진 호젓한 곳에 서 있던 이 석탑을 허물어뜨린게 아닌가 추측된다는 것이다.
작금 각종 유물과 골동품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적지나 사찰을 무대로 호리꾼들이 더욱 날뛰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번처럼 국보급의 귀중한 문화재를 송두리째 망가뜨린 무지막지한 소행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탑 속에 봉안된 유물이 돈으로 쳐서 과연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훔치기 위해 국보급 문화재를 송두리째 망가뜨린 범행은 어떤 핑계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망국적인 폭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탑의 복원이 가능하다고 한 문화재관리국의 말에도 불구하고 파손된 부분이 너무 많아 원형대로 제 모습을 갖추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전문가들의 얘기이고 보면, 하찮은 돈 몇 닢을 노린 이 범행이 빚은 손실치고는 너무 엄청난 것이라 해서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문화재란 더 말할 나위 없이 이 민족의 슬기와 조상의 얼이 담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이다. 비록 현재의「내 것」은 아닐지라도 영원에 걸쳐 승계되어야 할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내 것 이상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알뜰하게 보존하고 가꾸어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민족의 유산인 것이다.
최근 정책적 차원에서 누천년에 걸친 민족의 생존, 문화의 축적이라는 역사활동으로 빚어진 문화재들이 이 겨레의 자랑으로 인식하게끔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문화재로서의 필연적인 존재는 그 문화재가 지닌 본래의 역능이 무엇인가를 왜곡이나 변형이 안된 상태로서 보여주는 것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보호」가 한낱 전시 위주의 구호에 흐르거나 문화재 자체에 섣부른 손질을 가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번에 도괴한 석탑만 하더라도 지난 72년 문화재관리국의 해체 복원공사 중 기술부족으로 이미 커다란 손상을 입었던 것은 그 단적인 실례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보존상의 허점도 허다해서 관리 소홀로 인한 원형상실에다 도난사고까지 빈발하고 있는 것은 그 궁극적 책임이 문화재관리 당국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우리 나라 지정문화재 7백55점(국보=1백79점, 보물=5백76점) 가운데 3할 가량인 2백75점이나 되는 불교 문화재(그중 국보는 53점)가 파격적인 문화재 「붐」과 일부 승려의 타락으로 수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74년 전남 송광사의 국보 42호 목조삼존불감 도난사건에 이어 이번 백장암 석탑 도굴사건이 일어난 것도 불교 문화재에 대한 이 같은 관리상 허점이 빛은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도둑이나 호리꾼들을 붙잡고 그들에게 문화재의 중요성을 아무리 역설해본들 우이독경에 불과할 것이다.
백장암 석탑을 망가뜨린 범인들을 하루빨리 잡아 응분의 처벌을 해야겠지만, 당국 또한 문화재의 관리·보호제도에 근본적인 결함이 없는지 철저한 자체 점검을 해야할 것이다.
특히 사찰 문화재의 정확한 실태 파악과 함께 문화재나 골동품의 유통구조의 실상도 철저히 파헤쳐 호리꾼들이 발붙일 땅이 없도록 만반의 대책을 세울 것을 촉구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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