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위에 오르기(5) | 김병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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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천문가 『난 이런 경험을 합니다. 낮 동안 도시가 펄펄 살아서 저 빽빽한 「빌딩」의 거리마다 사람과 차량의 행렬이 넘칠 때나, 밤에 만원「버스」에 흔들리며 숲처럼 끝이 없는 「아파트」의 불빛들이 저마다 차창으로 달려드는 이 강을 건너오자면 분명히 절망적인 심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 거만한 도시가 말입니다. 뜻밖에도 새벽녘 이쪽에서 잠들어 있는 저편의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번엔 확실히 나의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묘한 자신감이 생기는 거지요. 나도 분명히 서울 사람일 수 있다 하는 자신감 말입니다. 내가 여기 나오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 자신감…어릴 적 우연히 지붕위에 올라갔다가 그 위에서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던 적이 있었지요. 눈을 떠보니까 놀랍게도 고요한 천지 속에 오직 쏟아질 듯한 별들만이 빛나는 세상이 펼쳐져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난…사실 형제들 중에서 제일 못난둥이여서 늘 따돌림을 받았지만 그때만은 방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 형들이 그처럼 바보 같아 보일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몰래 나는 온통 밤과 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밤을 내가 다 차지한 듯한 기분이었던 것입니다. (중얼거리듯) 지붕위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장소였습니다.』
실업자 (고개를 끄덕인다.)
천문가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장소에서 비밀스럽게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게 보이더군요.』
실업자 『결국 보다 잘 보기 위해서 형씨는 저렇게 천체 망원경까지 갖게 됐고…일테면 천문가가 된 셈이로군요.
천문가 『아닙니다. 그 정도까지야.』
실업자 『아닙니다. 형씨는 지금 따로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하나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만 합니다. 적어도 별들에 관해서라면.』
천문가 (픽 웃으며) 『별들이라고요?』
실업자 『왜요?』
천문가 『이미 요즘의 서울에서 별을 찾으려 한다는 건 무립니다. 그런 건 사실 이곳에 나오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지요. 여기 나와서 한번도 별을 구경했던 적은 없으니까요.』(잠시 말이 끊어진다.)
실업자 『형씨!』
천문가 (바라본다.)
실업자 『그런데 이런 얘기해서 안됐습니다만 (측은한 듯 바라보며) 생각해보니, 형씨의 그 방법이라는 것 말입니다…남 몰래 저 강 건너 도시를 바라보며 자신을 얻으려는 그 방법, 내가 보기엔 좀 떳떳치 못한 것 같군요, 누가 들으면….』
천문가 『누가 들으면?』
실업자 『오핸 마세요. (힐끔 보며) 정신나간 사람쯤으로 생각하기 쉽겠습니다.』
천문가 (화들짝 놀라며) 『뭐라고?…그럼 형씨는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걸?… (의혹이 범벅된 얼굴로) 이미 눈치채고서도 시침떼고 있었던 겁니까?』
실업자 (어리둥절하여) 『그곳이라니, 어디 말입니까?』
천문가 『신촌에 있는 그 유명한 대학병원의 신경외과 말입니다. 그곳에서 얼마 전 퇴원했다는 걸…알고 있었습니까?』
실업자 『아니, 형씨 같은 분이 왜 그런덴 다…….』
천문가 『몰랐었군요?』
실업자 『네, 전혀 짐작도, 그런데 왜…….』
천문가 『모르겠습니다.』
실업자 『이제 보니 농담을 하고 계시는군.』
천문가 『하지만 사실입니다. 회사로부터 어느 날 느닷없이 그런 조치를 받은 것입니다. 모두들 날 좀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수군대고, 하더니 결국은…』
실업자 『놀랐습니다. 형씨가…아직 피차 우리는 잘 모르는 사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형씨가 정신병원에 있던 몸이라니……』
천문가 『어차피 잘 된 일인지 모릅니다. 퇴원하고 나서부터 나는 아주 자유로워졌으니까요.』
실업자 『그야 그럴지 모르지만….』
천문가 『그런데…형씨.』
실업자 『말씀하세요.』
천문가 (의심스러운 얼굴이 되며) 형씬 내가 병원에 좀 다녀 왔다해서 지금 날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합니까?』
실업자 『별로…….』
천문가 『고맙습니다. (강을 바라보며) 그런데 결국 문제가 생기고 말더군요.』
실업자 『네?』
천문가 『아내가…….』
실업자 『내 아내 말입니까?』
천문가 『내 아내 말입니다. 무려 3년이 넘게 함께 살아왔던 그 여자가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실업자 『의심한다구요?』
천문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습니다.』
실업자 『형씨를 말입니까?』
천문가 (괴로운 듯) 『그렇습니다.』
실업자 『그럴리가.』
천문가 『정말입니다. 내가 병원에 있게 된 뒤로 아내는 확실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개 같은 년! 내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겠지만, 어림도 없어요.』
실업자 『정말 못 믿을 것은….』
천문가 『여잡니다. 아니, 아냅니다.』
실업자 (한숨처럼) 『결국 형씨의 아내 역시 완전한 형씨의 소유가 못 되는군요.』
천문가 『네 (한숨을 쉬며) 전혀, 이번에야 나는 그걸 알았습니다.』
실업자 (불쑥) 『헤어져 버리세요. 까짓거.』
천문가 『헤어져 버리라구요?』
실업자 『그렇습니다.』
천문가 『물론 병원에 있을 때부터 그런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왠지 두려워지더군요.』
실업자 『무엇이 두렵지요?』
천문가 『그러니까 (강물을 바라보며) 막연히 나도 모르는 그 무엇인가가, 일테면 지금 내 뒤에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한 두려움입니다.』
실업자 『뒤에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킥 웃으며) 원 세상에, 그런 의심이라면 그런 의심이 생길 때마다 직접 돌아다보면 될텐데요?』
천문가 『그렇겠지요. 그런데도 난 번번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쉬운 일인데도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병원에 있는 동안 내내 내 뒤를 확인할 때마다 동료의 신세를 져야했답니다.』
실업자 『이해할 수 없군요.』
천문가 『의심이란 한번 뾰족이 고개를 들고나면 그 싹이 순식간에 자라버리죠. 어느 정돈가 하면 심지어 어떤 날 밤엔 쭈그리고 앉아 썰렁한 벽에 등을 맞대고 밤을 새워야만 안심이 될 정도였습니다. 감각도 없을 정도로 등이 시려 왔지만 차라리 그 편이 마음 편하더군요.』
실업자 『…….』
천문가 『대체로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 움직이는 것 중에서 가장 가느다란 목구멍을 가진 그 어떤 것이 있다 해도 사실은 그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음식물은 그것의 목구멍보다 더욱 가느다랄 것이므로, 말하자면 내 뒤에서 한치의 틈도 없이 형씨가 등을 맞대고 서 있다 해도…….』
실업자 『아아 (손을 내저으며) 무슨 말인지 대강 알겠습니다. 도대체 형씨, 왜 그렇게 못된 버릇이 생겨버린 겁니까?』
침울한 얼굴로 천문가, 막 뭐라고 얘길 하려는데 가까이서 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한꺼번에 날카롭게 들려오는 바람에 그만 두 사람의 얘긴 끊어지고 만다.
잠시 침묵.
천문가 (가라앉은 어조로) 『형씨, 지금 내가 한 말, 병원이나 아내 얘기 또는 지붕위에 올라간 얘기며 두려움 따위에 관한 얘기 말입니다. 사실은 그걸 여지껏 누구에게도 해 보지 못한 얘기였습니다.』
실업자 『…그럼?』
천문가 『그렇지요. 내 비밀인 셈입니다.』
실업자 『저도 짐작은 했습니다만.』
천문가 『그런데…형씨에게 그런걸 죄다 얘기해 버리고 나니까 말입니다. 여간 꺼림칙하지 않군요. 혹시 형씨가 누군가에게 다 말해 버릴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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