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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일정표를 빽빽이 채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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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도쿄 총국장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현재 신기록을 갱신 중인 게 하나 있다. ‘무(無) 개각’ 기록이다. 취임 후 567일째 단 한 명의 각료도 교체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최장기록은 425일이었다. 툭하면 장관이 경질됐던 아베 1기 내각 때에 비하면 가히 경이적 기록이다. 비결은 뭘까.

 최근 만난 아베 총리의 한 측근은 “정답은 하나. 곁에 이지마 이사오(69) 특명담당 내각관방 참여가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이지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그림자였다. 비서관을 34년이나 했다. 고이즈미 총리 재임 5년5개월 동안은 정무비서관을 맡았다. 우리로 따지면 요즘 세간에 떠도는 ‘만만회’란 비선 조직의 일각, 이재만 총무비서관 자리다.

 이지마의 역할은 다양했는데 그중 핵심은 ‘인사기록 챙기기’였다.

 이지마는 우선 고이즈미로 하여금 다양한 인사를 만나도록 일정을 잡았다. 총리에게 저녁밥을 두 번 ‘먹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싫은 소리 하는 사람들도 과감하게 집어넣었다. 하루 평균 일정이 10건을 넘었다. 시중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게끔 하는 의도만은 아니었다. 이지마는 총리와 만난 이들의 ‘내공’을 총리와 함께 꼼꼼히 체크했다. 말하자면 ‘선행 인사’였다. 보고서 100번 훑어보는 것보다 얼굴 맞대고 5분만 이야기해 보면 어떤 인물인지 대강 알 수 있다는 게 고이즈미와 이지마의 공통된 인사철학이었다. 물론 금전 관계 등의 주변 정보는 수시로 업데이트했다. 이를 토대로 이지마는 인사안을 올릴 때 ○, △, X 중 하나를 골라 ‘점검의견’으로 올렸다.

 고이즈미는 총리 재임 중 이지마가 X로 올린 후보를 채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다. 그 덕분에 고이즈미 정권은 높은 지지율 속에 롱런했다. 아베는 이를 곁에서 지켜봤다. 2012년 12월 총리 취임을 앞두고 아베가 털어놓은 가장 큰 고민도 “어디 이지마 같은 사람 없을까”란 것이었다. 적당한 인물이 없자 아베는 아예 ‘고이즈미의 사람’인 이지마를 다시 모셔왔다. 그리고 ‘이지마 파일’은 아베 정권에서까지 빛을 발했다. ‘상시적 인사준비’의 결과가 ‘무 개각’ 기록으로 이어진 셈이다.

 지난주 끝난 인사청문회를 보며 “어떻게 저런 사람을…”이라고 혀를 찬 건 TV를 본 시청자뿐이 아닐 게다. 업무수행 능력 운운의 차원을 떠나 기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이 청문회의 링에 올라오니 어이가 없다. 뭐가 문제인가. 대면 검증을 소홀히 한 때문이다. 평소에 5분만 그들을 만나 봤어도 이런 ‘헛수고’는 없었을 게다.

 대통령이 보고서에 길들여지니 참모까지 서류에 파묻혀 있다. 코드를 맞출 게 따로 있지 그런 걸 맞추나. 총무비서관이건 비서실장이건 이제 할 일은 정해졌다. 대통령 일정표의 빈칸을 빽빽이 채워라. 참모건 외부인사건 가급적 얼굴을 맞대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이 싫어해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그들의 의무이자 존재의 이유 아닌가.

김현기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