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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규 기자 종군기] '문화재 寶庫' 국립박물관도 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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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바그다드 시내 피르두스 광장에 우뚝 서 있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동상이 무너진 지 나흘째인 12일.

고대문명을 탄생시킨 이라크의 수도이자 역사의 보고(寶庫)인 바그다드는 약탈과 방화.폭력이 난무하는 비(非)문명의 '적색지대'로 변해 있었다.

관공서와 상점은 물론이고 학교와 병원, 외국공관, 심지어 박물관도 약탈의 손길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날 시민 수백명이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에 난입해 1층에 있던 귀중한 문화재와 미술품을 쓸어갔지만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고 한다.

12일 오후 나는 미 3사단 사령부가 있는 캠프 도그우드를 떠나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갔다. 5군단 16지원단의 '공항 운항 재개 점검팀'과 함께 사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도심보다는 덜 하지만 바그다드 남부 지역에도 약탈의 흔적은 뚜렷이 남아 있었다. 남루할 대로 남루한 옷차림을 한 중년 남자가 호화로운 가죽 소파를 실은 손수레를 땀을 뻘뻘 흘리며 끌고 가고 있었다.

그의 집에는 과연 저 소파를 놓을 공간이나 있을까. 이틀 전 약탈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공화국수비대 건물은 정문이 활짝 열린 채 안은 텅 비어 있다. 이미 다 털린 걸까.

동행한 미 공군의 마이크 웨버 소령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한마디 한다. "그들은 훔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후세인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24년에 걸친 1인 철권통치에 빼앗긴 것이 어디 한두가지일까. 내가 이라크에 들어온 이래 눈으로 확인한 이라크인들은 대부분 헐벗은 모습이었다.

세계 2위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석유 부국'의 국민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행색이다.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함께 나타나고 있는 약탈과 무질서는 피억압이 초래한 극단적 감정폭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재 바그다드의 상황은 도를 넘었다.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아야 할 병원들마저 세 군데를 빼곤 모조리 털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보다 못한 국제적십자 관계자들이 미군을 찾아가 병원에 대한 약탈만큼은 막아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구호 활동을 벌이던 말레이시아 의사 한명은 약탈자들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중세에도 볼 수 없었던 폭력적 약탈 현상이 나흘째 바그다드를 휩쓸면서 미군이 일부러 방조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라크인의 자존심에 치명적 상처를 입힘으로써 친미정권 수립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저의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미군에게 달려가 "왜 약탈자들을 방관하느냐. 도시를 점령했으면 질서까지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항의한 시민까지 있다고 한다.

참다 못한 일부 시민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했다. 미군도 전직 이라크 경찰과 합동으로 순찰에 나서기로 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미 제7해병 연대는 이날 밤부터 자신들의 관할 하에 있는 바그다드 동부 지역에 대해 야간통행 금지령을 내렸다.

사담 국제공항 관제탑에 올라갔다. "쾅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버섯 구름 세 개가 피어 오른다. 후세인 정권의 몰락과 함께 야만의 도시로 변한 바그다드는 언제 문명의 도시로 되돌아갈 것인가.

바그다드에서

*** 안성규 종군기자 50여일간 戰場 1500km 누벼

안성규 기자는 미 국방부가 실시하는 '임베드(Embed.일선부대에 배속된 종군취재)' 프로그램에 따라 세계 40여개국 1백여명의 기자와 함께 이라크전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 2월 26일 쿠웨이트로 파견됐다.

미 제5군단 16전투지원단에 배속된 安기자는 지난달 24일 미군과 함께 이라크 국경을 넘어 남부 도시 카르발라를 거쳐 지난 10일 바그다드에 들어갔다.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50여일간 약 1천5백㎞를 누비며 이라크 전쟁을 취재한 安기자는 곧 쿠웨이트로 철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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