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억류 석희찬씨 풀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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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주「테헤란」미국대사관 인질사건으로 미국인들과 함께 미국대사관구내에 잡혀있던 석희찬씨(47·서울종로구계동3의2)가 인질 19일만인 22일하오1시35분(한국시간하오6시35분)풀려나 주「테헤란」한국대사관에 인도됐다. 석씨는 이날 무장한 「이란」학생 4명의 호송을 받으며 한국대사관에 도착, 김동휘대사집무실에서 대사관측에 인도됐다.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있는 「이란」학생들은 『우리는「팔레비」를 원한다』고 외치고 있으며 인질들에 대한 대우는 비교적 좋았다고 석씨는 밝혔다. 다음은 석씨가 국제전화로 본사에 알린 『「테헤란」억류 19일의 생활』이다.
지난 11윌4일 상오11시10분 초조와 불안, 체념의 연속이었던 나의 인질생활 19일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날 상오10시30분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대사관의 상무관과 내 사업에 관련된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상무관과 얘기를 나눈지 얼마안돼 갑자기 미대사관 문밖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합성이 터지더니 그 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정문에서 보초를 서던 해병이 뛰어들어 오면서 『「데모」군중이 대사관 쪽으로 몰려온다. 빨리 지하실로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2층에서 창을 통해 정문쪽을 보니 20∼30대의 「이란」학생 수백명이 대사관 정문을 통해 홍수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점점 함성이 커져오자 나와 얘기하던 상무관은 보이지 않았고 나도 당황해 얼른 사무실 문밖을 나갔다.
문밖 건물안 복도에는 대사관 직원들이 건물 현관문을 잠그고 아래층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처음에 아래층으로 피했다가 「이란」학생들의 격렬한 합성이 점점 심상치 않자 모두가 다시 2층으로 피했다.
나중에는 그것도 안돼 다시 3층으로 올라가 대사관직원들을 따라 큰방으로 들어가 함께 방문을 잠그고 냉장고와 「소퍼」등으로 문 안쪽에서 「바리케이드」를 쳤다.
이때 내가 있던 방에는 나를 비롯해 대사관 직원등 모두 35명 경도가 숨을 죽이고 갑작스런 일에 불안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3층까지 올라온 「이란」학생들이 밖에서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 고 소리쳤다.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쏟아져 들어온 「이란」학생들은 우선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손을 묶고 눈을 가리더니 어디론가 우리들을 끌고갔다. 일부 학생들은 M-16과 구식장총을 들고 있었다. 끌려간 곳은 대사관 집무용 건물에서 좀 떨어진 대사관원 숙소였다.
원래 대사관 직원들이 살던 곳이라 침대와 「소퍼」등 살림살이는 모두 갖춰져 있었다.
나는 처음에 조그마한 방에 「키오」라는 45세쯤 된 미국인(「테헤란」의 미국인학교 교장)과 함께 수용됐다.
이 자그마한 방에서 「키오」씨와 나는 3일을 일단 지냈다. 그동안 손과 발을 묶여 지냈으며 식사할때와 화장실을 갈때만 감시자가 따라붙고 묶은 것을 풀어주었다.
나흘째 되는날 미국인인질 3명이 다시 우리방에 수용됐다. 우리 인질들은 거의 한마디도 얘기를 나눌수가 없었다.
「이란」학생들은 인질들끼리 서로 얘기를 못하게 했다.
우리가 수용돼 있는 방에는 항상 「이란」학생들이 같이 기거하면서 지켰다.
처음 며칠간 식사로는 「이란」빵과 냉수만을 주었다. 그 다음 부터는 대우가 좋아져 아침식사로는 빵과 엽차, 점심·저녁은 「스파게티」나 「스테이크」등으로 나쁘지 않았다. 이들 식사는 대사관건물안의 주방에서 만들어져 오는 것같았다.
며칠후 내가 있던 방이 비좁아지자 나를 포함한 전부를 바깥 응접실로 데려갔다. 이 응접실에서 1주일간을 지냈다.
응접실에서는 인질7사람이 같이 먹고자고했다. 거기서도 얼마후 2사람이 딴곳으로 다시 옮겨갔다. 옮겨간 두 사람은 모두 흑인이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들은 석방되었다고 했다.
응접실에서는 「이란」학생4∼5명이 항상같이 지냈다.
그들은 우리 인질들과 함께 생활하며 같이 바닥에 누워자기도 했고 가끔 지시를 어기고 인질들과 얘기를 나누기도했다.
한 「이란」학생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호기심에 찬듯 얘기를 걸어왔다. 영어는 상당한수준이었다.
『한국이 참 많이 발전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먼저 한국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잠깐 얘기한후, 내가 『한국인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인과 우리는 서로 친구간이다.』 나는 다시 『왜 이런 소동을 벌이느냐. 좋은 해결방법이없겠느냐』고 물었다.
그 「이란」학생은 『우리는 다만 「팔레비」만을 원할 뿐이다. 그외에는 누가 어떤 위협을 가해와도 끝까지 저항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대화가 항상 계속될 수는 없었다.
주변이 조용해지면 초조하고 불안했던 감정이되살아나견디기가어려웠다. 「이란」학생들에게 붙들리고나서 2주일동안 계속 묶인채였기때문에 신체도 부자유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란」학생들은 때로 인질들의 발을 책상다리에 묶어놓기도 했으나 그렇게 심하게 대우하지는 않았다.
특히 학생들이 인질들을 수시로 바꿔 수용했기때문에 바깥 사경이 심상치않음을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 그들은 인질들을 의도적으로 계속 번갈아 바꾸어 수용하는 것같았다. 그것은 인질들끼리 무슨 계획을 꾸밀까 싶어 그것을 방지하려는 것같았다.
2주일이 지나서 부터 초조와 불안이 좀 가시는 대신 『될대로 되라』는 체념이 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어느정도 마음이 편해진 것은 인질들에대한 「이란」학생들의 대우가 그리 혹독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읽을 책을 갖다주었기 때문이다.
감시하는 「이란」학생들은 회교식 예배시간이 되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철저하게 회교의식에 젖어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어떤 커다란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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