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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박정희 62성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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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남부럽지 않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집념으로 18년반동안 이나라를 이끌어온 고박정희대통령-.
○…박대통령은 1917년 11월14일 경배 선산군 구미면상모리117번지에서 여덜마지기의 소농인 박성빈씨와 백남의씨의 5남2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두아들과 큰딸을 이미 결혼시키고난 45세의 어머니 백씨는 뒤늦은 잉태를 꺼려 아기를 떼려고 간장도 마시고 눙수버들가지를 달여마시기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아기가 태어난뒤에는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만8세가 되어 가난한 집에서나마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것도 어머니의 보살핌 때문이었다.
당시 90호가 살던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닌 아이가 셋밖에 없었고 박대통령의 7남매중에도 세째 형 상희씨와 자신만이 학교교육을 받았다.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뒤 구미국민학교 개교이후 처음으로 박소년은 대구사범에 입학했다.
1천9백명 지원에 일본학생 10명, 한국학생 90명이 입학했으니 무려 19對1의 경쟁율이었다.
이 대구사범시절에 그의 강한 성격과 경쟁심은 더욱 두드러지게 단련되었다.
그는 보통학교시절 상모리길가에서 동네 개구장이들과 막대기로 전쟁놀이를 즐기고, 통학길에 자기보다 키크고 나이많은 학우들과 뜀뛰기 경쟁을 하던 버릇이 있어 특히 검도와 뜀뛰기를 잘했다.
처음에는 검도에서 일본인학생들을 이길 수 없어 맹훈련을 거듭했다. 학교「밴드」부에서는「코넷」연주자로 활약했는데 이것도 일인 학생들보다 잘해보려고 밤마다 기숙사에서 어찌나 연습을 열심히 했던지 학우들이 귀가 따갑다고 불평들을 할 정도였다.
이시절 구미에서 신문사지국을 차리고 있던 셋째형에게서 빌어 읽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이순신」이 그에게 큰감명을 주었다.
「게따」짝 소리와 일본순사의 칼소리에 짓밟혀 있던 그의 민족의식이 비로소 눈을 떴다고박대통령은 후에 회고했다.
○…37년 20세의 나이로 대구사범을 졸업한 박대통령은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두메산골 부락민들의 가난한 생활과 어린 제자들의 야윈 몸과 굶주림을 보며 마음아파 한적이 많았다.
어린 학생들이 질병에 걸리면 그는 넉넉지 못한 자기 봉급에서 약을 사다주었으며 밥을 굶는 학생들에게는 가끔 자기 도시락을 나눠주기도 했다.
상급반 학생들에게는 일인들의 눈을 피해 조상들의 시조와 이순신장군 이야기를 들려줘 민족혼을 깨우쳐 주기도 했다.
그는 3년동안의 교직생활을 그에게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시비를 걸었던 「데라도」(사호)시학의 밥상을 들러엎는 것으로 하직했다.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40년 장춘교외에 있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일본·중국·몽고인등이 섞여있는 이학교에서 예과2년을 최우등생으로 졸업해 일본육사 본과에 입학하는 특전을 받았다.
44년 봄 일본육군소위로 입관된후 2차대전이 끝날때까지 1년반동안 만주곳곳에서 날뛰던 공산「게릴라」부대를 토벌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2차대전이 끝나자 박중위는 북경에서 광복군에 들어가 중대장으로 활약했으나 그속에 침투해 있던 공산당원들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46년 6월 해방된지 얼마만에 그는 광복군 부하들과 함께 미군 LST를 타고 천진에서 부산항에 도착, 귀국했다.
○…고국에 돌아와 잠시 고향에 가있던 그는 그해 9월 23일 서울에 올라와 육사2기생으로 입교했다. 만29세의 나이로 20세전후의 젊은 청년들과 3개월간의 단기교육을 마치고 과거의 군대경력이 고려돼 대뜸 대위로 임관됐다.
49년 5월부터 50년10월까지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북한공산주의자의 6·25남침을 예견한 적정판단서를 작성. 보고했으나 묵살됐다.
당시 군내부에는 부패가 만연했으나 박대통령은 이를 철저히 배격한 청렴한 장군으로 알려졌다.
군수품 횡류사고가 많던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해 얼마되지 않아 박장군은 서울에 유력한 끈을 갖고있던 부정장교들을 모두 몰아내버렸다.
그 당시 조카란사람이 찾아와 도움을 청했으나 박장군은『너는 팔·다리가 없느냐. 나는 국가명령에 마라 공무를 띠고 있는 사람인데 무엇을 이떻게 보아 달라는 말이냐』고 준엄하게 타일러 보냈다.
3.15선거때는 부산지구 선거 책임을 맡은 CIC의 모대령이 찾아와 부정선거에 협조를 요청하자『난 그런 짓을 못해. 부하들을 감독해야할 내가 그런 부정을 시켜야 된단 말이냐. 이따위 선거를 하면 뭘해. 너희들 마음대로 해』하고 호통을 치며 한뭉치의 투표용지를 북북 찢어 난로에 처넣기도 했다.
4·19가 난뒤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박장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한뒤 성난 군중들이 경남도청을 마구 부수려 할때는 자신과 군인들이 모두 국민들 편이며, 법과 질서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연설로 군중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4·19후 육군에서는 김종필중령등에 의해 숙군이 단행되어야 한다는 하극상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육군본부의 고급지휘관참모회의에서 박소장은 소장이상의 모든 육군장성은 군부패의 잭임을 지고 퇴역하는게 좋겠다는 제의를 했다.
4·19후 민주당이 집권했어도 혼란은 그치지 않았다. 가난이 해결될리도 없었다. 그래서 박장군은 혁명을 생각하게되었다.
혁명은 육사8기생들과 박장군의 두핵으로 계획되고 추진되었으며 이 두 움직임은 박장군선에서 통합되었다.
혁명후에 8기생 혁명주체들은 『박장군 자신이 우리는 미처 모르고 있었던 작전계획과 비장계획을 별도로 갖고 있었고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줄도 미처 몰랐던 각 병력지휘관·공군 작전장교·통신장교들과도 치밀하게 사전접촉을 해놓았다는 사실이 차차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해서 l961년5월16일 미명 5·16혁명의 봉화가 올랐다.
『5·16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식확립의 혁명이며 사회적으로 근대화 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창업혁명이며 국가의 재건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혁명이다』
박대통령은 그의 저서 『나의사랑 나의조국』에서 5·16혁명을 이렇게 기술했다.
5·16혁명후 박대통령은 혁명의 지도자로, 5, 6, 7, 8, 9대 대통령으로 18년반동안 이나라를 이끌어 왔다.
63년의 민정이양, 69년 3선개헌, 72년의 10월 유신이란 대변혁의 과정을 통해 박대통령은 국가의 안전과 보위, 경제개발, 새마을 사업, 주체의식의 함양, 민족문학의 계발등 모든 부문에 걸쳐 이나라에 탈바꿈을 가져왔다.
○…박대통령은 50년8월 부산피난시절에 사귀기 시작한 육영수여사와 그해 12월12일 대구시계산동 천주교성당에서 결혼했다. 당시 박대통령은 육군중령이었다.
육여사는 옥천의 부유한 지주 육종관씨의 1남3녀중 차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씨는 자수성가한 분으로 철저한 검약생활을 가훈으로 삼았다.
군인과 결혼해 젊은 시절에 가난한 결혼생활을 겸험해본 육여사는 둘째딸을 가졌을때 사과가 몹시 먹고싶었지만 수중에 돈이 없어 사과를 사먹는다 것은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사치였다고 회고하곤 했다.
그러나 육여사의 검약성은 박대통령의 꿋꿋한 결백성과 잘 어울렸다. 박대통령의 집권이후 가족의 생활환경에도 필연적으로 변화가 왔지만 육여사는 될 수 있는한 그때까지 해오던 생활방식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74년8월15일 육여사의 피격별세는 가족에게뿐만 아니라 국민적인 슬픔이기도 했다.
박대통령과 육여사 사이에는 근혜(27) 근영(25)의 두영애와 영식 지만(21)생도가 있다.
서강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큰영애는 어머니 별세후「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맡아아버지를 보필하고 정신운동인 새마을 운동을 주도해왔다.
큰영애는 12세대 천주교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박대통령은 그 결심이 그녀 자신을 위해 옮은 결심이기를 바란다며 일단 결심을 했으면 종교적 의무를 지키는데 시종일관해야 한다고 충고해 주었다.
서울대음대 기악과를 나온 작은 영애는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공적행사에는 일체 얼굴을 내밀지 않고 사진을 찍히는 것도 피해왔다. 그렇기때문에 친구와도 비교적자유스럽게 어울렸고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는 일도 적지 않았다.
영식은 현재 육사3년생. 박대통령은 영식이 고등학교 3학년시절 아버지와 같은 군인이 되고 싶어 육사에 가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을때 무척이나 대견해하고 기뻐했다고 한다.<성병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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