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안숙선 판소리 명창·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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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동영상은 joongang.co.kr [최효정 기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남원국악원에서 전통음악을 배우기 시작할 때 내 나이가 아홉 살이니 무슨 신념이 있었을까. 한창 뛰어놀아야 할 시기에 춤·악기·소리·창극 훈련을 받으며 숙명에 몸을 떨었다. 외가댁이 배출한 시대의 명창과 예인을 이어 그 피붙이로서 대물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눌렀다. 머리가 크면서 우리 음악에 대한 편견이 나를 슬프게 했다. 민족의 혼과 정서가 깃든 예술이란 평가보다는 잔칫집에 울리는 풍악 취급을 당하니 젊은 처자로서 굴욕감까지 들었다.

 그렇게 속상하고 분해서 떠는 내게 친척 오빠가 사준 시집에 이 시가 있었다. 되풀이해 읽으며 힘든 상황을 떨치고 나갈 수 있었다. 소리꾼의 삶이 녹록지 않아서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도 이 시로 마음을 되잡았다. ‘소리에 미쳤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독하게 연습에 몰두할 수 있게 나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준 이 시는 내 인생의 보물이다.

안숙선 판소리 명창·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