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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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외교정책의 목적은 최다수의 우방, 최소수의 적을 만드는데 있다』-. 16일 우리나라를 처음 공식 방문한 이광요「싱가포르」수상의 외교철학이다.
서울보다 좀 작은 면적(6백16.3평방km)에 인구 2백35만 명, 중계무역에 크게 의존해온 항구도시국가인 「싱가포르」외교의 단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동남아의 중립화와 비동맹을 표방하면서 북한과도 등거리외교자세를 견지하던 이 수상의 방한은 우리외교의 한 성과라 할만하다. 그는 수년전 연두시정연설에서 『한국민의 근면성을 배우라』고 말해 우리나라에 친근감을 표한 적도 있다.
이 수상은 59년 「싱가포르」자치정부수립이래 20년, 65년 「말레이지아」연방에서 독립하고 난 후부터는 14년 간을 수상으로서 「싱가포르」를 통치해 왔다.
그동안 「싱가포르」는 동남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을 누려왔다. 대내적으로 강력한 반공정책과 반정부세력을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는 국내보안법 등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장은 『무질서와 정권에 대한 도전을 현행법만으로 다루기 어려울 경우에는 극적인 조치로 질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반공주의자인 그도 집권할 때는 공산주의자의 힘을 빌었다.
그는 「싱가포르」의 「래플스」대를 거쳐 23세에 영국「케임브리지」에 유학, 법학을 공부했으며 이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때까지 그는 좌경민족주의자였다. 귀국해서 변호사를 개업하며 반 식민투쟁을 벌일 때 그는 공산당과 손잡았다.
54년 사회주의자·공산당·민족주의자의 공동전선인 인민행동당을 창당하여 사무총장에 피선됐다.
자치정부의 수상이 된 그가 독립의 과도단계로 「말레이지아」와 합병을 주장하자 공산당은 대거 인민행동당에서 탈당했다. 이후 그는 공산당과 손을 끊고 가차없이 탄압했다.
이때 그는 『공산주의자와의 대결에서는 그들을 공개된 대결장에 내세워 압도함으로써 궁지에 몰아넣어야 한다』는 전략을 체득했다.
그의 인민행동당은 주요 야당이 총선거를 「보이코트」한 총선거이래 의회의 전 의석을 독점해 왔다.
「싱가포르」에는 노동당·인민연합전선·사회당 등 몇 개의 야당이 있지만 유명무실한 존재들이다. 이 수상은 『개발도상국에는 건전한 야당이 필요하지만 그런 야당은 집권 후의 확실한 정책대안을 가진 정당이라야 한다』고 믿고 있다.
공정하고 정직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 엄격한 부정방지법을 제정했고 주택정책 등 사회정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수상은 「싱가포르」인구의 76%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계. 중국 남부 광동성에 사는 「핫가」족 출신으로 증조부 때 「싱가포르」에 이주해 온 화상의 후예다. 그의 할아버지는 「싱가포르」∼「인도네시아」간 정기여객선의 경리담당자였고 아버지는 「셸」석유회사에서 정년퇴직 후 지금은 시계보석상에서 일하고 있다. 깔끔하고 치밀해서 너절하고 태만한 것을 보면 못 참는 성미다.
조직력이 뛰어나지 않는 대신 우수한 인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으며 차근차근 따져 들어가는 토론의 명수이기도 하다. 취미는 「골프」와 달리기. 부인 가벽주여사도 「케임브리지」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지금 「리·앤드·리」법률사무소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슬하의 2남1녀 중 「이웨이링」양이 이번에 함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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