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무명월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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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늘은 우리도 어디 날씨얘기나 합시다. 이를테면 영국신사의 인사말처럼….
옛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사말로 『진지 잡수셨습니까?』라 했다지만 따지고 보면 너무 청승떠는 얘기였소.
아니 사람 사는데 밥 한끼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조석으로 밥타령만 했는지 적이 딱한 일이오.
입에 풀칠하기가 그다지도 어려운 세상이었던 탓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비지 먹고도 이쑤시는 양반어른에게까지 『진지 잡수셨습니까?』했다면 장난치곤 너무 짓궂었다 해야겠소.
거기 비긴다면 『천고마비의 가을이 됐습니다』니 『초승달이 몹시나 곱습니다』하는 게 얼마나 운치있고 여유있는 인사겠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하는 인사말도 흔했다하지만 아무리 난리가 많았기로 그토록이나 마음죄어가며 살아 그 무슨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 보기 나름이라오.
「걸리버」가 매우 착하고 현명한 말(마)나라에 이르러, 지독한 하등동물을 만났을 때의 얘기를 상기해볼까요. 『이처럼 추하고 흉측스런 짐승은 처음 봤다. 그것들처럼 소름이 오싹해지는 게 없었다.』하나 「야프」라는 이름의 악취가 물씬거리고 악덕에 찬 짐승은 바로 인간이었답니다.
「스위프트」가 인간 세상을 풍자하기 위해 쓴 『「걸리버」의 얘기』속에 나오는 대목이지만 외국사람치고는 제법 잘 봤지요.
하나 사람은 모두다 이렇게 「야프」처럼 추하다고 여기고 나면 오히려 살기가 편한 법이라오.
너무 믿는 게 탈이라오. 너무 기대하는 게 탈이라오. 그러니까 툭하면 야속해지고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워지는 게 아니겠소.
원래가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악하다고 여기고 나면 그런대로 살맛도 날것 아니오. 그렇잖으면 어떻게 이 세상을 단 하루라도 살수 있겠소.
모든게 마음먹기 나름, 보기 나름이라오.
『벽암록』에도 수가무명월청풍이란 말귀가 있답디다.
참으로 씹을수록 맛이 나는 선지의 지언이라오.
권세있는 집이라 해서 달이 더 크고 더 맑은 게 아니지요. 내 집위에 초승달이 떠 있을 때에는 남의 집에서도 초승달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오. 비좁은 소견으로 이렇게 풀이했더니 이 글귀엔 더 깊은 뜻이 들어있다고 어느 스님이 일러 주십디다.
어진 부처의 마음씨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들어있다는 뜻이랍니다. 이걸 실유불성이라 하든가.
그렇다면 눈감아줄 수 없는 악인도 따로 없게되지요. 이게 쉬운 일은 아니겠소만, 요새처럼 맑은 가을달을 쳐다보노라면 뭔가 느껴지는게 각별한 것도 같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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