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손…귀국여부 알길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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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원측은 불교가 이미 신라사회에 뿌리를 깊이내리고있던 진평왕 34년에 신라왕손으로 태어났다. 당나라에 건너간것은 그의나이 15세때. 어학적 소질이 뛰어나 불교의 원전어인 범어에 능통했고 인도를 향해 구법의 길을 나섰던 현장이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그의 역경사업에 가담, 수많은 저술을 냈다. 목록에 기록된 그의 저서는 모두 23부 1백8권에 이르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반야심경찬』 1권, 『인왕경소』 6권, 『해심밀경소』 10권의 3부뿐이다.
원측에 대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삼국유사』와 최치원의 『휘일문』이 전할뿐이다.
원측이 과연 귀국하였는지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다. 조명기박사(동국대)등 학계의 일부에서는 원측이 유식학을 터득한뒤 1차 고국에 들어왔다가 불우하였기 때문에 다시 당에 돌아갔다는 설이 있고, 고 박종홍박사는 『그때 이미 7순이 넘은 노령이었으므로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을것』(한국사상사)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익진교수(동국대)는 『어떻든 중국은 그를 놓으려하지 않았고 또한 엄격한 골품제사회인 신라에 귀국하여도 뜻을 펴기 곤란했을것』이라고 합리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원측에 대한 연구는 이밖에도 「캐나다」의 일본계 반전소대낭박사(「브리티시·콜럼비아」대)가 「티베트」 자료를 이용, 세계학계(1966년 「뉴욕」 동양학자대회)에 발표함으로써 『「티베트」 불교에 끼친 원측의 영향』이 크게 주목을 받고있다.
일중우호중국연구자 방중단의 일원으로 원측의 유적지를 답사한 「가마다」박사는 『중공국무원에의해 중요문화재 67호로 지정, 잘 보존돼있는 신라승 원측의 유적을 한국학계에 알리게돼 기쁘다』고 신지숙교수(동국대)를 통해 전해왔다. <방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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