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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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용운 스님은 비차비속의 생활을 하면서도 때때로「내가 중이아니었더라면 가슴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고 했다. 그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킨 다음 마수를 중국대륙에 뻗치자 스님은 늘 「왜놈은 곧 망한다. 왜놈은 곧 망한다」했는데 그 일제가 당신생각처렴 그저 쉽게 망하지 않 는것도 울화가 차미는 일이었고 스스로 일제를 타도할 만한 아무런 힘이 없는것이 또한 울화가 치미는 일이었다. 경성지회회장으로있던 신간회가 해산되고 거기다 육당선생과 같은 동지들이차래로 전향하는 것은 더욱 가슴 답답한 일이었다. 육당선생이 전향했을때는 그집 대문 앞에 엎드려 육당은 이제 죽었다고 통곡할 정도였다.
스님이 얼마나 일본을 싫어했는가 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심우장이야기가 있다. 심우장은 스님이 55세되는해 전숙원여사와 결혼할 당시 「불구」지를 인쇄하던 대동인쇄소 홍정필사장과 말진우선생이 건축비를 마련해서 성북동 양지바른 산허리에 세워준 사가였다. 그런데 스님은 남향으로 집을 지으면 충독부 청솜를 매일같이 바라보게 된다고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이다.
이같이 일본을 철저히 싫어하는 스님은 생애에 단한번 통감부에 간청한 일이 있었다. 중용완 김윤직의장이 맏아보고 그가 도의시해온 불가에도 이런 문장가가 있는가 감탄하고 한말의 명문이라고 칭찬한 「승려취처」를 허락해 달라는 「헌의서」와 같은 내용의 「건백서」를 1910년9월「데라우찌」(사내정의)통감에게 낸것이 그것이다.이 건백서는 스님답지않게「엎드러 (복이) 운운」하며 시작하고 있는데 「승려의 결혼을 부처님의 계율이라하여 금한것은 그 유래가 오래나 모든 법도를 유신 해야하는 오늘의 현실에는 적합하지가 않음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만약 승려로 하여금 한번 결혼하는것을 금한채 풀지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적 식민과 도덕적생리 종교적포구에 있어서 백해가 있고 이익은 하나도 없습니다」하고서「통감부」의 영으로 간빈의 누습을 타파하여 세상에 드문 치종을 이루기를 바라나이다. 정치는 천신하는 것이 으뜸이니 속히 도모하드록 간곡히 기원해마지 않습니다 했다.
스님의 이같은 소신은 뒤에 불구유신론에서도 거듭강조되고 있는데,이 때문인지 어느때의 엇본산왕지회의는 스님을 청하여 법문을 돋구자 했다. 거절하는 스님에게 간청을 해서 겨우 듣게된 법문은 이러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고 큰 소리로 물었다. 대답이 없이 숙연했다.
『그러면 자문자답할 밖에 없겠습니다. 가장 더러운 것은 똥입니다.똥.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 이있는데 무엇이겠습니까?』아무런 대답이 없자『그러면 또 자문자답하지요. 내 경험으로는 송장썩는것이 똥보다 더 더럽습니다. 왜 그런고하면 나는 감옥에 있을때 똥옆에서는 옴식을 먹었는데 송장썩는 잎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송장보다 더 더러운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님은 법상을 내리치면서 대학일갈『그건 너희들 31본산 주지놈들이다!』 하고 뒤도 돌아보지않고 법당을 나가버렸었다.
스님이 이같이 31본산의주지에게 일갈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불교」지를 페간한데 대한 감정이 컸던 것이다. 스님은「중이되지 않았더라면 가슴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할 정도로 암담한 생활속에서 오직「불교」지에 글을 쓰고 심혈을 기울여 「불교」 지를 간행하는 일로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잡지를 재정난을 이유로 31본산주지회의가 폐간을 해버렸던것이다.
그런데 31본산주지회의가 재정난을 들어 잡지를 폐간한 것은 한낟 구실에 불과하다고 한용운스님은 생각하고 있었다.
폐간의 직접적인 원인은 스님이 쓰는 글이 31본산주지들에게 타당치 않을뿐 아니라 불교계의 유일한 기관지인「불교」지에 총독부에 대해 불경한 글이 실려 그 책임을 총독부가 31본산주지들에게 물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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