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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제65화 불교 근세 백년 (38)|유교 법회|강석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37년 총본산의 사원을 한창 짓고 있는 8월에 선학원에서는 유교 법회라는 선객들의 모임이 열렸다. 이 법회는 전국의 유수한 선장들이 모여 10일간 계속 했는데 모이게 된 동기가 좀 엉뚱한데 있었다.
춘원 이광수씨가 우연한 기회에 총독부 학무국장 「도미나가」 (부영)를 만난 일이 있었다.
이때 「도미나가」는 춘원에게 『한국 불교가 이같이 무질서하고 지리멸렬해서는 안되겠다. 교단을 맡아서 잘해 나갈 사람이 없겠는가. 지금까지는 교종에 교단을 맡겨왔는데 선종에 그런 인물이 없겠는가. 선종의 고승들을 만나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춘원은 곧 4촌형인 이운허 스님을 찾아가 「도미나가」 학무국장의 뜻을 전하고 적당한 기회에 고승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법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였다.
운허 스님은 원보산 스님과 이 일을 상의하였다. 두 스님은 춘원의 말과 같이 고승 법회를 여는 것도 좋으나 우선 총독부 학무국장을 만나 그의 흑심이 무엇인지 직접 들어본 연후에 결정하기로 하였다.
박문사가 총본산을 하겠다는 흉계를 가지고 있고 우리 쪽에서 총본산을 짓고 있는 때에 학무국장이 그런 말을 했으므로 총독부의 저의를 헤아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두 스님은 춘원의 소개로 「도미나가」 학무국장을 총독부로 찾아가 만났다. 그런데 「도미나가」는 고승 법회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춘원의 말에 의하면 고승 법회의 경비까지도 대주겠다고 했다는데 전혀 말이 없자 두 스님은 총독부의 의사와는 무관한 법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두 스님은 춘원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두 사람만 알기로 하였다. 운허 스님은 직지사로 청담 스님을 찾아가서 이일을 상의하였다. 청담 스님은 곧 쾌락을 했고 이어 만공 스님을 찾아가서 고승 법회 개최를 상의하였다. 또한 운허 스님은 박한영 스님과 상의하였으며 송광사까지 가서 효봉 스님과도 상의하여 1937년8월 3일∼13일까지 고승법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모임을 고승이 아닌 자들이 모여 고승 법회라 한다고 비난하며 크게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교무원에 관계하는 인사와 31본산주지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31본산주지대표인 이종욱 스님이 유달리 고승 법회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법회를 준비하는 운허 스님과 청담 스님이 종로서에 여러 차례 불려가 법회를 열지 말도록 갖은 협박과 희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관변의 작용이 반대하는 스님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채서응 스님이 『이 모임 중에 한 두 사람의 고승은 있을 것이므로 고승 법회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비난을 받아가면서 고승 법회라 해서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부처님의 유지를 받들어 행하는 무리이므로 그 점을 따서 유교 법회라 함이 좋겠다』해서 법회를 유교법회라 했다.
법회는 박한영 스님의 유교 경강설을 중심으로 해서 만공 동산 만암 스님 등이 번갈아 설법을 하였다.
이때의 회중은 한영 서응 영명 적음 자운 무불 상월 동산 만공 효봉 만암 청담 스님등 일대의 노·장층 선장 40여명이 운집했는데 방한암 스님만이 불참했다. 방한암 스님은 당시 월천사 중대에 계셨는데 다시는 산을 나오지 않겠다 하고 선정에 들어있을 때였으므로 2,3차에 걸쳐 법회에 참석하도록 문도 들이 찾아가 권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한편 오성월 스님이 법회 중간에 왔으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아 돌아갔는데 그때 스님에게는 독신이 아닌 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대처는 전혀 참석이 허락되지 않았다.
한편 근래에 없던 선장들의 법회를 본 신도들이 다투어 공양을 하겠다고 했으나 정해진 10일로는 신도들의 요청을 다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에 신도들은 비단으로 장삼을 지어 참석한 모든 스님들에게 드리겠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은 비단 보다는 무명으로 해달라고 하였다. 40여명의 장삼을 지을 무명을 서울에서는 한꺼번에 샅 수가 없어 인천까지 가서 사오기도 했는데, 이때 최범술 스님이 기왕이면 이 기회에 보조 장삼으로 지어 입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고 제의하여 보조 장삼을 지어 입게 되었다. 이 보조장삼이 지금 비구승들이 입고있는 장삼이다. 그때까지는 팔이 도포와 비슷하게 생긴 두루마기 식의 장삼을 입고 있었다.
뒤에 31본산주지회의에서 주지들은 보조장삼을 입기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어느새 비구독신승은 보조 장삼을 입고 대처하는 스님은 재래의 장삼을 입는 것이 상식으로 되었다.
이 보조 장삼을 계기로 얼마 뒤에 자운 스님의 발의로 지금 비구승들이 입는 낙자와 비슷한 오조가사도 등장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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