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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42명을 구한 「지붕 위 대피작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급류에 휘말려 떼죽음을 당할 뻔했던 한 마을 주민 42명이 목숨을 아끼지 않은 한 청년의 기지와 용기에 힘입어 극적으로 구출됐다.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 인정과 희생의 꽃을 피운 사람은 충남 보령군 대천읍 궁촌리 구시마을 김종일 씨(33·고물상).
김씨는 처마 밑까지 차 오른 탁류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12가구 주민 47명 가운데 실종자 5명을 제외한 42명을 지붕위로 질서 있게 대피시켜 목숨을 건지게 했다.
이 마을은 대천읍을 가로지르는 대천천(폭50m) 하류에 자리잡은 강변부락.
마을 앞쪽은 강물이 굽이쳐 흐르고 뒤쪽은 논으로 둘러싸인 저지대여서 비가 조금만 내려도 주민들이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곳에 집중호우가 쏟아진 것은 4일 밤11시부터.
주민들은 3시간여 동안 방안에 갇혀 전전긍긍하다가 새벽2시쯤 마을 앞 빈터에 나가 서성였다.
이때까지는 대천판 잠수교(길이50m, 폭2·5m, 높이1·5m)에 물이 차지 않아 모두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3시30분쯤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쏴』하는 급류소리가 김씨의 귓전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뛰쳐나가 보니 잠수교는 이미 물에 잠겼고 마을 안길까지 넘실거리고 있었다.
김씨는 우선 집에서 자고 있던 부인 김예환 씨(28)와 건넌방·문간방에 세든 유근돈(33)·김정남(37)·김근집(44) 씨 등 4명을 깨워 지붕으로 피신시켰다.
이어 11가구 문을 차례로 두들기며 『홍수 났다. 대피하라』고 외쳐대 모두 깨웠다.
주민들은 시시각각으로 물이 차 오르자 당황, 모두 마을을 뜨려했다.
물은 이미 무릎높이까지 차 올라 마을이 외딴섬처럼 고립됐다.
김씨는 『사방이 급류다. 마을을 등지면 몰살한다. 지붕 위로 올라가 구조대를 기다리자』며 급류를 헤쳐나가려는 주민들을 설득, 지붕으로 올라가도록 했다.
성급히 마을을 벗어나려던 백남용 씨(71)와 부인 박춘희 씨(52)·딸 금순 양(18·공원) 등 일가족 3명은 1백여m쯤 전진하다 급류에 휘말려 실종됐다.
마을가장자리에 사는 정태상 씨(42)의 부인 임내월 씨(32)는 한 살 박이 2남 원영 군을 이고 지붕에 오르나 발을 헛디뎌 탁류에 휩쓸려 헤어 나오지 못했다.
기둥을 붙들고 울던 정씨의 맏딸 은영(11·한내국민교3년)·미영(9·한내국민교1년)양 자매는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대들보에 매달려 떠내려가다 김씨에게 구출돼 지붕으로 올라갔다.
이 통에 김씨는 왼쪽다리를 유리조각에 찔려 상처를 입었다.
주민들이 10채의 지붕 위에 올라간 것은 새벽4시쯤.
물이 처마 끝까지 육박, 주민들의 목숨은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김씨는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주민들에게 『한치도 움직이지 말고 동틀 때까지 기다리자』고 격려했다.
새벽5시를 고비로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먼동이 떴다.
상오7시30분쯤 군부대에서 급파한 「헬리콥터」 2대가 도괴직전의 지붕 위에 앉아있던 20명을 구출한 뒤 나머지 주민들은 수위가 계속 낮아지면서 군경구조대가 던져준 밧줄을 잡고 무사히 탈출했다. <보령=임시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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