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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연매출 54조 올린 판교 … 반바지 입고 출근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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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SK플래닛 법무지원그룹의 허세론(29·가운데) 매니저가 회사에 출근한 후 자신의 BMW스쿠터에서 내리고 있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넥타이에 정장 차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바지에 백팩을 맨 직원들의 출근 모습은 대학 캠퍼스를 방불케 한다. [사진 SK플래닛]

#1. SK플래닛 법무지원그룹의 허세론(29) 매니저는 ‘오토바이족(族)’이다. 서울 사당역 인근 집에서 성남 판교테크노밸리 사옥까지 배기량 650㏄의 BMW 빅스쿠터를 타고 출근한다. 도로교통법상 자동차 전용도로를 이용할 수 없어 국도를 따라 돌아오느라 주행거리는 22㎞에 달하지만 넉넉잡고 25분이면 회사에 도착한다. 회사엔 허씨처럼 오토바이로 출퇴근하는 직원이 5명 더 있다. 회사는 오토바이 주차장까지 갖춰 이들의 출퇴근을 돕는다. 허씨는 오는 9월초 추석연휴를 끼고 열흘 이상 휴가를 내 하와이에 다녀올 계획이다. 휴가가 길다고 사내에서 눈치 주는 사람은 없다.

 #2. 게임업체 넥슨의 선승진(33) 게임 디렉터는 내년초 회사 동료들과 11박12일로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등반을 다녀올 계획이다. 등반은 회사에서 ‘글로벌체험프로그램(GEP)’이란 이름으로 마련한 창의성 개발 과정 가운데 하나다. 해발 5895m의 킬리만자로에 오르려면 사전훈련이 필수다. 연말까지 2주일에 한 번씩 주말을 이용해 국내는 물론 가까운 일본·중국으로 전지훈련도 가야한다. 2012년 11월엔 같은 프로그램으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도 다녀왔다. 선씨는 “게임개발은 창의적인 일인데 반복된 일상 속에 갇히다 보면 아이디어가 마른다”며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내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 업무적으로도 자극이 많이 됐다”고 말했다.

판교테크노밸리 기업들의 사내 시설을 모아놓으면 하나의 ‘타운’이 된다. 사진 위쪽부터 당구시설을 갖춘 SK플래닛 사내 카페, 엔씨소프트의 목욕탕과 어린이집, 직원 자리마다 이색 캐노피가 펼쳐있는 넥슨 사무실과 사내 골프시설. [사진 각 업체]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떠오르고 있는 경기도 성남시의 ‘판교테크노밸리’에 입주한 기업들 사이에 정보기술(IT) 인재 유치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남쪽 66만1000㎡(약 20만 평) 부지에 조성된 판교테크노밸리는 2008년 한국파스퇴르연구소가 첫 입주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870개 IT관련 중·소·대기업들이 입주했다. 이들 기업의 직원수를 모두 합하면 5만8188명이다. 870개 기업들의 연매출을 합하면 54조 원에 이른다. 대기업 그룹 계열사로는 포스코ICT·SK플래닛·삼성테크윈·SK C&C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게임업계의 대표기업 넥슨과 엔씨소프트는 판교테크노밸리의 대표적 얼굴이다. 이외에도 안랩과 NHN엔터·카카오 등 업계를 대표하는 인터넷 기업 본사가 들어서 있다. 다산네트웍스 등 IT분야 제조업체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IT기업, 특히 인터넷이나 게임 등 소프트웨어 분야 기업은 인력이동이 잦다. 게임업체 넥슨과 엔씨소프트의 평균 근속연수는 만 4년이 안 된다. 개발자들이 프로젝트를 따라 움직이기도 하고, 카카오 등 최근 덩치를 급격히 불려가는 기업들이 인재 끌어 모으기에 나선 탓도 있다.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기 위해 업체들은 미국 구글을 넘어서는 파격적인 사내 복지시설을 갖추고, 자유로운 출퇴근과 열흘 이상의 긴 휴가, 편안한 근무복장 등으로 유혹한다.

오토바이·자전거 전용 엘리베이터 설치

 판교테크노밸리에서 가장 큰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엔씨소프트의 직원들은 출근하면 회사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지하 2층에 웬만한 대형 사우나 못지 않은 목욕탕과 찜질방이 있다. 목욕탕에 딸린 라커만 224개다. 황토방과 소금방이라는 문패가 걸려있는 한증막엔 섭씨 72도를 가리키는 온도계가 걸려있다. 지하 1층 구내 식당은 대형 놀이동산의 식당가 느낌이다. 천장 높이가 8m에 달하고 좌석수만 700석이 넘는다. 끼니마다 분식, 한식, 아시아 면요리, 이탈리아 요리, 인도 요리 등 다섯 가지 메뉴가 공짜로 제공된다. 식당 바로 옆에는 600석 규모의 컨벤션홀까지 갖췄다. 주중에는 각종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주말엔 결혼식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식당 옆엔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헬스장과 국제규격의 실내 농구코트까지 갖추고 있다. 사내 어린이집에는 교사 등 45명의 직원이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직원 자녀들을 돌봐준다. 엔씨소프트 황순현 전무는 “핵심 경쟁력은 게임 개발인력에서 나온다”며 “장시간 앉아서 일하는 이들이 피로를 풀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을 갖춘 것”이라고 말했다.

 인근의 경쟁사 넥슨도 만만찮다. 사내에 스크린골프 시설까지 갖춘 실내 골프장과 탁구장·헬스장·수면실 등을 마련해 업무 중 어느 때라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사옥 1층 앞에는 오토바이 전용 주차장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오토바이·자전거 전용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다. 옥상에는 맑은 공기를 즐길 수 있는 야외정원과 각 팀별로 운영하는 텃밭, 조깅을 할 수 있는 전용트랙과 옥외 농구장 등이 있다.

 SK플래닛은 업무시간 중에도 언제든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리프레쉬 센터’와 캡슐수면실을 갖췄다.

CEO부터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 근무

 테크노밸리에선 ‘넥타이 부대’를 찾을 수 없다. 최고경영자(CEO)부터 파격이다. 김정주 넥슨 회장은 면티와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다닌다. 넥슨의 임원은 자기 방이 없다. 김 회장도 마찬가지다. 회사의 빈 공간을 찾아 앉아서 근무하고, 결제는 대부분 e-메일이나 전자결제시스템으로 처리한다. 남자 직원들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출근하고 일한다. 직원의 평균 연령이 32.5세일 정도로 젊은데다, 분위기 자체도 자유로운 대학 캠퍼스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고급 카페를 닮은 카페테리아엔 일반 기업이라면 집중업무시간에 해당하는 오전 10시에 젊은 직원들이 곳곳에 앉아 수다를 떠느라 시끌벅적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간 탁구장엔 남녀 직원이 탁구를 즐기고 있다. 넥슨의 안인숙 이사는 “처음 사옥을 찾은 사람들은 ‘넥슨 사람들은 일은 언제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두들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진행하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우는 직원은 없다”며 “보기엔 여유있게 보일지 몰라도 업무강도가 높은 직장 중 하나”라고 말했다.

 판교테크노밸리 동쪽 탄천을 넘어서면 한국가스공사와 토지주택공사 등 공기업들이 몰려있는 분당이다. 폭 수십m의 작은 천(川) 하나를 건널 뿐이지만, 분위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여름철이라 넥타이를 매진 않지만, 대부분 정장 바지에 흰색 반팔 와이셔츠 차림이다. 

해외 트레킹, 자전거 국토 종주 프로그램

‘판교테크노밸리언’들에게 ‘휴가 눈치’란 없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지 않거나, 미혼인 직원들은 여름휴가 대신 한적한 봄·가을 휴가를 즐긴다. 주말을 끼워 열흘 일정으로 유럽이나 미국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게 일반적이다. 휴가제도도 파격이다. 넥슨엔 ‘3-6-9 재충전 휴가제도’가 있다. 입사 3·6년차가 되면 각각 열흘간, 9년차가 되면 20일의 휴가를 다녀올 수 있다. 9년차가 지나면 또 ‘3-6-9’시스템으로 휴가를 받을 수 있다. SK플래닛은 입사 10년차 직원에 45일짜리 안식휴가를, 5년과 15년·25년차에도 열흘의 위로 휴가를 준다. 또 모든 직원들은 기존 연월차 외에도 연간 5일의 체력단련휴가도 쓸 수 있다.

 직원들의 창의성을 살려주기 위한 프로그램도 많다. 넥슨은 예술과 문화·인문 등 다양한 방면의 체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넥슨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직원들이 업무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등정, 자전거 국토종주와 같은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판교테크노밸리의 한 기업인은 “비슷한 기업들이 몰려있다 보니 인력 유치 경쟁이 뜨겁다”며 “여러 가지 시설과 제도는 직원의 창의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결국 ‘우리 회사가 최고’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판교=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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