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덕흥리 고분 주인공은|고구려인이 아닌 중국인|관직도 모두 중국명|명문 중「신도」는 중국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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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에서 최근 발굴된 덕흥리고분의 피장자가「고구려인」이 아니라「중국인망명자」 라는 주장이 나와 학계의 주목을 끌고있다.
김원룡교수 (서울대) 는 최근 간행된 「역사학보」제시집에 실린『고구려벽화고분의 신대료』에서 이 같은 주장을 편 것이다.
김교수는 여기서 북한에서 최근 발견된 우산리 고분 3기와 보산리 고분, 그리고 덕여리 고분 등 5기의 고분을 설명하면서 북한학자들이 『동수묘를 미천왕전이라고 하고 덕흥리 고분의 명문을 억지해석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76년 발견되어 77년에 발굴한 「덕흥리고분」은 북한학자들과 일본인학자 상원화교수의 주장처럼「고구려인」의 것이 아니라 중국인 망명자 전 유주자사 순의 무덤이라 했다.
그 이유로 ① 명문 제1행의 「신도」는 북한측이 평북 운산군 가산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억지이며 실은 「하북」 생기현으로 따라서 피장자는 중국출신이다 ② 제3행에서 제5행 유주자사까지는 그가 거친 관명들인데 이는 모두 중국관명이고 다만「소대형」만이 고구려 것이다 ③ 전에 유주자사를 지낸 진이 고구려에 귀화하여 「소대형」 벼슬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④ 따라서 고구려통치가 미쳤다는 주장은 할수 없다. ⑤ 은은 영락 18년 사망했다고 기록되는데 이는 반세기 동안 연호를 사용하는 것과 대조되어 평야지방에 대한 고구려 통치 방침의 변화를 볼수 있다.
고구려 통치방침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즉 고구려가 서진책을 내릴 즈음엔 평양지역 중국계 주민은 일종의 자치령처럼 남겨 장수 유력인물로 통치하게 하였으며 4세기 말쯤에 고구려가 직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⑥ 화면엔 4신 또는 불교적 요소가 난무하며 ⑦ 화공은 중국계 혹은 중국 화파로 볼 수 있다는 등을 들었다.
한편 김교수는 『이 「덕흥리 고분이 408년에 만들어 진것임이 고문에 의해 분명한 만큼 고구려고분의 편년에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고 지적, 각저총·무용총의 6세기 전반 건립설도 수정돼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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