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이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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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l973년6월3일 저녁7시. 「센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을 주름잡던 한 중국인 「갱」단의 두목이 3발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
그런지 4일 후에 한국청년 이철수군이 살인용의자로 잡혔다.
그에게는 당당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사건이 있던 시간에 그와 전화로 통화했던 중국계여학생이 있었다. 줄곧 그와 함께 지냈던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검찰측은 이 「알리바이」를 확인하려들지 않았다. 관선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왜?
처음부터 경찰은 의도적으로 이철수군을 진범으로 몰아가려 한게 틀림없다.
체포됐을 때 그는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범행에 사용된 흉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총알이 그 총구에 꼭 맞는다고 경찰은 우겨댔다.
그뿐이 아니다. 8인의 현장목격자중의 3명만이 그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나머지 5명은 그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검찰쪽에서는 범인이 그와 같았다고 지목한 3명만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왜?
공판중에 검찰측은 그가 소년원과 정신병원을 전전했고, 마약사용과 절도의 전과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가 그늘진 환경에서 자란 불행한 소년이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묵살되었다.
그는 흉악범들이 득실거리는 형무소에 갇혀있었다. 그 울안은 죽느냐 사느냐의 폭력이 난무하는 생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피부 빛깔이 노란 이철수군은 그 속에서는 호랑이의 밥이나 같았다. 그런 절박한 상황이 그로 하여금 같은 복역수를 숨지게 만들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변호인단은 이를 정당방위라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앉았다.
왜?
엊그제 12명의 배심원은 그가 제1급 살인범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재판장은 지체없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배심원들이 평결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2명중 아무도 그의 유죄를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1959년에 「베를린」영화상을 탄 『12명의 성난 남자들』이란 「헨리·폰더」주연의 영화가 있다.
살인죄로 몰린 한 소년을 유죄로 평결하는데 배심원들은 5분도 안걸렸다.
모두가 무더운 방안에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한 배심원은 배신한 자기 아들에 대한 분풀이를 그 소년에게 하려했다. 「헨리·폰더」는 이들의 편견·아집과 끈질기게 싸우며 드디어 무죄로 바꿔놓는다.
공판이 끝나자 이철수군의 변호인단은 끝까지 「편견」에 찬 재판이라고 말했다. 「헨리·폰더」와 같은 배심원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일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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