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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적」이라는 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기자에겐 왜「바바리·코트」를 입히나>
직업=기자. 어느 신문기자나 조금도 망설임없이 신원「카드」에 이렇게 적었었다.
그런데 요새는 누구도 잠시 망설인다. 망설이는 이유는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울 것같다.
『회사원이라고 쓰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내가 뭐 대단스럽게 기자적이지도 못하면서….』『언론인이라고 쓸까…. 좀 거창한 것같은데?』
겸손도 있고 자만도 섞이고, 또 특이한 주목을 피하려는 보호색욕구도 있고…. 어쨌든 오늘의 신문기자는 예전보다 섬세한 저울질을 한다.
최근에 어느 연구소가 조사한바에 따르면 한국의 기자들이 기자를 직업으로 택한 이유는 크게 세가지다.
「자유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해서」=28%,「가장 개성이 강한 직업이기때문에」=24%,「사회정의의 구현을위해」=24%.
자유롭고, 개성이 강한 것을 나타내려니「바바리·코트」를 입혀놓는 것일까. 영화나 TV「드라머」는 신문기자에게 으레「바바리·코트」를 입혀놓는다. 그것도 깃을 높여서….
그런데 미묘한 것은, 기자를 그렇게 분장하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기자들은 못마땅히 생각한다.
자유·개성·끈기를 말해주는「콜롬보」형사의「코트」와도 같은 것을 스스로 못마땅히여기는 것은 아마 스스로가만드는 신문을 안타까이 여기는 것과 비슷한 심정일지 모른다.
독자의 대부분이 신문의 주장이나 의견에는 큰 관심을 두지않고 즐겨 읽히는 것은 사회면의 범죄기사와 문화면의 오락기사들이라는게 기자들에겐 좀 섭섭하다.
대중문화의 탓도 있고 또 신문이 그것에 봉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문의 본래적인 것이 좀 밀려있는 것같아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이다.
신문은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잘 다듬어진 다면경이다. 오늘의 신문은 그대로 오늘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사설이 물에 물타는 적이 많고 신문소설에서 예술성보다 오락성이 더 요구되고 있는 것도 모두 기자만으로는 어쩔수 없는 사회의 힘에 의해서다.
그런 속에서 신문기자들은 그래도 신문이 잡보를 담은 인쇄물이 아니고, 기자는 회사원아닌「저널리스트」가 되려고 안간힘을 써보기도 하는 것이다.
어느「저널리즘」입문서에 훌륭한 기자의 자격을 다음과 같이 열거해놓았다. 정의감·건강·감수성·착빈성·문장력·사교성·외향성, 그리고 연구심.
이만한 자격을 다 갖추면 다른 어느 분야에 뛰어들어도 대성할게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수입도 적고 앞날도 뻔한 기자직을 택하게 된데는 까닭이 있다.
그는 신문기자 이외에는 할것이 없다고 자인해왔다. 도시, 모범생은 기자가 되기 어렵다는 말들도 하고.
그러나 정·관계로 뛰어든 어제까지의 기자들이 두 번째로 선택한「커리어」에서 상당한 적응능력을 발휘하여 판단에 혼란이 일고 있다.
기자들을 신문사에 10년이상씩이나 붙어 있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타성만이 아니다.
「콜롬보」형사는 언제나 허름한「레인·코트」를 입고 낡아빠진 자동차를 몰고 싸구려「시가」를 물고다닌다.
그가 쫓아 다니는 범인들은 모두가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사는 상류사회의 명사들이다.
그들은「콜롬보」형사를 맞대고 경멸하고 조소한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태연자약하다. 값진 술병을 보고 한잔 마셔봐도 되겠느냐느니, 그 양복값은 아마 내 한달 월급 보다도 비싸겠읍니다며 비웃음을 자독하기도 한다.

<직업에 대한 긍지」가 유일한 방패
그가 의연할수 있는 것은『너는 범죄자요, 나는 너를 잡아넣을 형사』라는 철저한 직업의식과 투철한 선악관, 그리고 자기 직업에 대한 긍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허름한「레인·코트」를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다.
그가 쫓는 범인들은 모두「에스태블리시먼트」의 일부다. 그리고「콜롬보」의 형사직이란 그런「에스태블리시먼트」를 지키기 위해 있다. 그러면서도「콜롬보」의「레인·코트」는 그를「에스태블리시먼트」로부터 가려주고, 맞서게 만들어주는 힘의 상징과도 같다. 형사「콜롬보」의 매력은 바로 이런데 있다.
신문기자도「콜롬보」형사와 다를바 없다. 그는 허름한「레인·코트」대신에『무관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지니고 다닌다. 적어도 다녀왔다.

<「저널리즘」과「아카데미즘」은 전도됐다>
그가「콜롬보」와 다른 것은 처음부터「에스태블리시먼트」밖에 서있었다는 사실이다.
딱하게도 오늘의 신문기자는 신문이 어느사이엔가「에스태블리시먼트」밖으로부터 조금씩 그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니면 그런 사실을 애써 눈감으려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신문기자는「아카데미션」들 보다도 더 딱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흔히「저널리스트」하다는 것은「아카데믹」하다는 것의 반어로 사용되어 왔다. 곧 가치판단과 내일 지향적인「아카데미즘」에 비하여 오늘의 현상만을 쫒고, 가치판단을 처음부터 포기하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오늘은 이게 뒤바뀌어졌다.「아카데미즘」이「아카데믹」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 기자가 그저「저널리스틱」한 직능에만 안주할 수는 없지않겠느냐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오늘의 신문기자에게는「콜롬보」의「레인·코트」처럼 그를 지탱해주는 방패가 없다. 그래서 방패가 되지못하는「바바리·코트」분장을 역겨워하는지 모른다. 정말로 자신을 지탱해주는「그 무엇」을 갈구한다.『무관의 제왕』이라는 칭호는 이제 부르는 사람도 없지만 어울리지도 않는다.
여기에 오늘을 사는 신문기자의 새문제가 있고, 고뇌가 있고, 불행이 있다고 할까.
그래서 기자들은 서로가 다짐한다. 오늘의 신문기자가 큰 보람을 느낄수 없다해서 피해자의식을 갖거나 자학에 빠질 수는 없다고 채찍한다. 그것은 지극히도 무력한 일종의「알리바이」를 꾸며내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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