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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4)제61화 극단「신협」-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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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극단 「신협」(신극협의회)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극예술협회 얘기다. 「극협」은 「신협」의 전신일뿐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신협」의 얘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극협」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창단되었다.
광복과 함께 우리말을 되찾은 민족은 극장으로 몰려들어 자기나라 말의 정다움과 아름다움에 감격하였고 그말을 창조해 주는 연극에 무한한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과거 연극활동에 참여했던 모든 연극인들이 무대에 동원되었고 극단이 수십을 헤아릴 정도로 생겨났으며 대학을 비롯한 학원에서도 연극이 행사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2차대전후 최대의 비극이요, 현대 국제정국의 암인 사상적 대립은 역시 한국에도 광란을 일으켰다. 좌우익의 대립은 정계·문화계·학계에 일대 혼란과 격렬한 대립을 가져오게 하였던바 연극계도 역시 그러한 양상은 예외일 수가 없었다.
더우기 연극은 대중과 더불어 창조하는 예술이며 서민의 예술, 대중의 예술이기 때문에 그 본질을 착각하는 몰지각한 연극인의 선동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하게된 연극인이 상당한 수에 달했던 것이다. 오히려 몇개의 순수한 예술극단을 제외하고는 모든 상업극단이 좌경한 듯한 인장을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 수많은 정치선전 도구였던 좌익극단에 대항하여 순수한 민족극을 수립하고자 고군분투한 극단이 바로 극예술협회였던 것이다.
「극협」은 유치진선생을 중심으로 이화삼·김동원·박상익·김선영씨, 그리고 나등 6명이 창단「멤버」였다.
유치진선생은 처음 「극협」 참여를 사양하였다. 해방뒤 좌익연극단체의 극성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유선생은 연극활동 자체에서 손을 떼고 쉬고 있을 때였다. 유선생은 당시 갈월동에 살고 계셨는데 내가 여러차례 자택을 방문, 새극단 참여를 간곡히 부탁했다. 처음엔 완강히 거절을 했으나 결국은 나의 열성에 뜻을 바꾸어 새출발을 결심, 「극협」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되었다.
「극협」이 조직되던 그무렵 우파기치가 선명한 민족극단으로 「민예」극단이 탄생했었다. 「민예」는 약체였음에도 동란직전까지 순수신극운동에 첨병역할을 했었다.
이 극단의 대표자는 과거 극예술연구회 제1기생 이광내씨였고 송재노·맹만직·신좌현씨등이 참여했었다.
이광내씨는 일제시대 동아일보의 장막극 모집에서 『촌선생』으로 당선, 극작과 연출활동을 해왔는데 두드러진 작품은 내지 못했으나 꾸준한 활동을 보인 연극인이었다.
「극협」은 인적구성은 되었으나 작품을 무대에 올릴 경제적인 힘이 없었다.
이때에 등장한 이가 성악을 전공하던 이「안드레」란 음악인이었다. 이씨는 당시 상당한 재력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클래식」을 전공하면서도 「탱고」음악을 좋아해 자신이 대표로 하는 「탱고」악단을 조직했다. 악단이라 하지만 「오키스트러」만한 큰 규모였다.
결국 「극협」의 창단 기념공연은 이 이씨의 주선으로 막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때의 작품이 유치진작 『조국』이었다. 『조국』은 3·1운동을 소재로 한 민족극이었는데 해방뒤 유선생이 발표한 첫 극이기도 했다.
지금은 증권회사 건물로 바뀐 명동의 명치좌(해방뒤 시공관)에서 『조국』의 막이 오르던 날 「극협」의 동인들은 새로운 감격에 가슴이 뛰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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