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영웅은 엽검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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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54년 「프랑스」 군이 「디엔비엔푸」 공방전에서 월맹군에 패배함으로써 호지명의 월맹이 공식적으로 「인도차이나」반도에 나타나 오늘날 「인도차이나」 반도 3국 공산화의 첫걸음이 됐다.
지난 25년간의 「베트남」전사에는 「디엔비엔푸」 공방전의 승리자는 바로 월맹의 「지압」으로 기록돼 있고 그후 제2차 월남전에 있어서 「지압」의 「게릴라」전술은 하나의 전설이 되다시피 했었다.
그러나 최근 중공은 공산 「베트남」이 친소노선으로 기울고 중공과 새로운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디엔비엔푸」의 승리가 「지압」이나 호지명의 것이 아니라 바로 중공의 엽검영 (현 부주석)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디엔비엔푸」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은 중공군의 참전을 심각하게 토론했다고 전사는 밝히고 있다.
「프랑스」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중공 장군이 「지압」의 참모로 작전을 지휘했으며 20명의 중공군 고급장교들을 지휘했다고 하며 1천대의 중공 운전사들이 모는 「트럭」에는 월맹군과 무기를 가득 싣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51년부터 54년까지 중공의 무기공급은 초기의 3백t에서 후반기에 4천t(매월)으로 증가했으며 52년 11월 「프랑스」군은 소극 장군이 「카오방」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진광 장군이 50년 8월부터 중공-월맹 연합참모본부에서 지휘하고 있음을 포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군 참모부의 정보로는 이 군사지원 내지 참전의 최고 책임자가 엽검영으로 지적되고있다.
54년 3월 가열화 된 「디엔비엔푸」 공방전에는 37mm포 64문의 중공 포병대가 직접 「프랑스」 군을 포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주 전투와 전략수립은 「지압」이 했다는 점은 무시될 수 없다. 「디엔비엔푸」의 승리를 「프랑스」정보를 토대로 본다면 제1주역은 「지압」이며 제2의 역할은 중공이 했다는 것이다.
【파리=주섭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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