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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 불가능한 행정 명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실행이 불가능한 행정 명령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해서 처벌 할 수 없다고 판시한 대법원의 판례는 최근 행정 권력의 부당한 행사 경향이 두드러져 가고 있다는 우려에 대한 일대경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각급 기관에서 일률적으로 하향 시달되는 여러 가지 행정 명령 또는 처분 가운데는 물리적으로나 사회 통념상 합리성을 결여한 사례가 적지 않아 많은 낭비와 부작용을 빚고 있다는 것은 행정 개혁위의 실태 조사 결과로도 여러 차례 밝혀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고등 법원에 접수되는 행정 처분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이 해마다 늘어가고 가처분 결정에 의해 구제되는 경우만도 10건에 1건 꼴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근자 행정관서의 처분이 얼마나 법령의 한계를 뛰어 넘은 월권이거나 과잉인가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행정력의 과잉 행사 경향은 행정의 비대화 현상과 더불어 두드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론 행정이 정책 목표의 달성만을 서두르는 나머지 모법의 입법 취지를 망각하거나 방법과 절차의 적법성, 주민 사정 같은 기본적 요소를 도외시하는데서 비롯되는 결과로 분석된다.
목표 달성에 대한 의욕만으로 무리하게 행정력을 행사할 때 상대방인 국민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짓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행정도 그 권력의 근원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오직 그 행사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만 정당화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행정 기구나 권력의 비대화도 국민의 복지와 권익 증대를 위해서 용납되는 것이지, 결코 행정을 위한 행정의 비대화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국민의 사정을 무시한 행정 행위가 무절제하게 자행 된다면 민주 행정은 유명무실해지고 만다.
이런 뜻에서 능률주의·실적주의만 강조하는 전근대적 관료주의 작풍은 하루빨리 지양되어야 한다.
행정이 비민주적이거나 획일성을 탈피하지 못하면 국민의 이익 보장은 사실상 기대할 수 없다.
물론 부당한 행정 명령이나 처분으로 권리가 침해당한 국민이 재판에 의해 구제를 요구 할 수 있는 행정 소송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나라의 행정 소송 범위는 극히 좁고 국민의 권리에 대한 충분한 보장이 확립되어 있다고 하기에는 여러 모로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때문에 행정 기관에는 행정권을 행사하는 전제로써 엄격한 적법성이 사건에 담보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정 행위의 정당성은 일반 국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상급 행정 기관과 하급 행정 기관 사이의 내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보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 명령과 처분의 발동·집행 전에 그 대상을 면밀히 파악하고 집행 방법과 파급 효과는 물론 성과까지 충분히 산출해 본 다음에 시행하는 자세가 정립되여야겠다.
이와 함께 행정 기관의 권한 행사에 필요한 준칙으로서 행정 절차법의 제정도 서둘러야 할 과제다.
이 같은 노력 없이 주먹구구식 탁상 시달이나 책임 모면을 위한 형식적 행정 명령 등을 남발한다면 마찰과 부작용은 물론 행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대법원의 판례를 계기로 합리성에 입각한 행정 풍토의 회복을 위한 각성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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