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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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조 문종이 승하한 해에 어린 단종은 상제 노릇을 하느라고 몸이 몹시 쇠약해 있었다. 그때는 6월이 되어 한창 더울 무렵이었다. 대신들은 어린 왕에게 심허 기약 하니 소량의 소주를 들게 해 기량을 차리도록 했다는 고사가 있다.
지금도 촌로들은 여름에 더위를 먹으면 소주를 조금 마시게 한다. 단종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과연 기량을 돋궈 줄 만한 소주가 우리 주변에 있는지 궁금하다.
오늘의 세풍은 옛 소주의 맛과 향기조차 잊을 정도로 합성주에 젖어 있다.
원래 우리 나라는 소주를 「노주」 또는 한주라고 했다. 이슬처럼 받아내는 증류주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술의 모양을 보고 백주·기주라고도 한다.
그러나 소주의 전래가 연고가 되어 「아라키」주라는 이명도 있다. 몽고인이 「페르샤」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증류주도 함께 들여 온 것이 내력이 되었다. 「아라비아」어로 증류주를 「아라키」라고 한다. 우리 나라엔 그 몽고의 「아라키」가 전해진 것이다. 고려 때부터 즐겨 이 술을 담가 마셨으며 이조시대엔 특히 성행했다.
『찹쌀 한 되와 멥쌀 한 되로 가루를 만들어 정한수 마흔 국자에 그것을 풀어 몹시 끓여 다시 식혀서 따스하거든 누룩 넉되를 넣어 많이 차지 않은 곳에 두었다가 이튿날 찹쌀 한말을 익게 쪄서 매우 차거든 먼저 밑술에 섞어 넣어 이레 (7일)가 지나거든 고으라. 가장 좋으면 18국자가 나며 보통이면 16국자가 난다.』
이조 초기의 처방이다. 증류 방법은 술을 담은 병과 빈병을 가지고 입을 맞추게 한다. 술병에서 수증기가 나와 빈병으로 들어간다. 이때 빈병을 찬물로 식히는 장치를 해야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부터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 등지에서 특히 소주를 애음해 왔다. 한여름에는 남도에서도 이 술을 빚었다.
서울에서는 소주 마시는 철은 5월 모란이 필 때부터 10월 국화가 필 때까지였다.
그 대부분은 공덕리 (지금은 동) 마포 등 막 부근에서 담갔다. 3월에 술을 담가 20일쯤 되는 때에 술이 익으면 뚜껑을 덮고 진흙으로 술독을 밀봉해서 보존했다. 5월 신선에 모란이 피면 비로소 그 뚜껑을 연다. 오늘의 도수로는 37∼38도쯤 되는 술이었다. 공덕리엔 70여년 전만 해도 1백여 호의 소주도가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만주산 좁쌀을 재료로 쓰면서 소주 맛은 변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대량 생산은 그 맛을 한층 흐려놓았다.
정부는 이번에 세법 개정안을 내면서 향토주 속에 명소주를 포함시켜 놓았다. 과연 향수 어린 소주 맛이 되살아날지 입맛이 다셔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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