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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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휘파람 내뿜으며 어슬렁이는 저녁나절에 난간에 기대어서 고향쪽 돌아보네.』
이렇게 노래한 노여만이 아니라, 이조시대의 선비들은 곧잘 난간에 기대어서 시를 읊었다. 족히 시조는 난간문학이라고 할만도 하다.
실상 우리나라 옛 건축에선 난간은 떼놓을 수 없다. 그만큼 흔하다. 공도 많이들었다.
사랑채 옆에는 으례 누마루가 있고 그 둘레는 갖가지무늬를 새긴 나무 난간을 둘러놓는게 보통이었다.
가령 비원속에는 난간으로 둘러싸인 정자며 누각투성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출입금지 되어있다.
까닭은 간단하다. 요새 관람객은 난간에 걸터앉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옛 난간은 걸터앉기엔 너무 약한 것이다.
서민들에게 낯익은 난간은 역시 다리에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다리난간으로는 수표교가 있었다.
돌로 만든 이 난간은 어른 허리 높이로 다리 위를 가로 질려있었다. 보기에는 단단했지만 황소나 마차를 막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난간의 아름답기로는 그밖에도 창경궁의 옥천교, 돈화문 안의 금천교 등을 꼽았다.
그것들은 물론 관상용이었을 뿐이다. 도시 옛 난간에서 안전도를 찾는다는건 우스꽝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새도 난간이 혹은 기능성보다는 겉치레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어제 33도가 넘는 복더위 속에서 버스가 인도교의 난간을 부수며 물 속에 추락하는 참사가 있었다.
만약에 난간이 튼튼했다면 그런 참사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당연히 떠오르는 생각이다.
옛 오문수교나 수표교의 난간들은 그만하면 그 당시로서는 안전했다고 봐야 옳다.
파리의 유명한 「미라보」다리의 난간은 아름답게 조각된 강철제다.
그것도 만약에 버스가 들이받으면 절단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완성됐던 1893년에는 기능과 미를 겸한 완벽한 것이었을 것이다.
난간을 만들 때의 국제적 기준은 1m길이의 난간이 3백50㎏의 중량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돼 있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 그 다리 위를 뭣이 달리게 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계산을 해야 한다.
물론, 난간을 버스가 들이받는 일부터 없어야 하는 일이기는 하다.
스위스의 절벽 산길 속에 흔히 걸려있는 철도다리나 차도다리에는 이렇다 할 난간이 없다. 그렇다고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튼튼한 난간보다도 난간이 필요 없는 안전도 점검이 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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