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시대의 경영혁신 전략] 실적부진 중견그룹 … 제품 수 줄여 생산·AS 단순화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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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호 21면

기업의 성과 부진은 한 가지 원인에 의해 발생하기보다는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 또한 회사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므로 핵심 원인도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견그룹에서 복잡성 문제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성전자의 권오현 부회장은 복잡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제가 경험한 삼성전자의 부진 사업부들은 하나같이 너무 많은 프로젝트, 너무 많은 제품에 자원과 시간을 분산시킨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구조는 전자산업과 같이 신기술·신제품 개발 속도가 중요한 분야에서는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부진한 사업부를 맡게 되면 사업부가 관리하는 제품과 프로젝트 수를 50% 정도 줄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③ 복잡성의 시대 기업 경영 전략

한국 중견그룹의 부진은 신사업·신시장에 진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이런저런 사업에 역량이 분산된 데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 신사업·신시장 진출의 실패로 인해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한국 대기업들은 2008년 금융 위기를 맞았다. 갑작스러운 매출 감소에 당황한 기업들은 매출 회복을 위해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다양한 맞춤형 제품들을 빠르게 내놓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연구소와 공장은 예전 수준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물류 창고도 부족하다고 한다. 그런데 매출이나 수익성은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평균적인 현주소다.

글로벌 IT사, 제품 80% 줄이니 주가 두 배
과거에 비해 매출 규모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수익성이 저하된 데는 복잡성이 일으키는 낭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유사한 매출 규모라고 하더라도 제공하는 제품의 수가 증가하면, 프로세스의 복잡도와 이를 처리하기 위한 조직과 시스템의 전문성이 증가해야 한다. 복잡성 증가는 이를 처리하기 위한 투입 자원의 증가로 이어져 원가 증가를 유발하고, 적절히 관리하지 못하면 품질이나 납기 등 고객 서비스 저하를 유발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제품·프로세스·조직 등 기업의 각 측면에서 발생하는 복잡성이 상호 작용해 그 효과를 증폭시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제품 수가 세 배가 되고, 프로세스 수가 세 배가 되고, 조직 규모가 세 배가 되면 기업의 복잡성은 9배(3+3+3)가 아니라 27배(3×3×3)가 된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복잡성의 패턴 때문에 과거에는 그 효과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미미했던 문제가 갑작스럽게 회사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 되는 것이다.

글로벌 IT 기업 A사는 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무선통신 및 RFID(무선인식)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이며, 업의 특성상 제품력과 함께 고객 서비스 수준이 차별화 요인이다. 이 회사는 B2B 사업인 만큼 고객 요구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제품을 다양화해왔다. 그런데 제품 복잡성 수준이 프로세스의 능력을 초과하면서 고객 납기 준수율이 저하되고, 고객 불만족이 증가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대응해 경영진은 80% 이상의 제품을 줄이고 프로세스와 조직 전반의 복잡성을 제거하는 과감한 혁신을 추진했다. 복잡성 제거의 효과는 놀라웠다. 고객 만족도가 크게 향상되었고, 기존 제품의 유지 관리에 분산되었던 연구개발 인력을 신제품 개발에 투입해 신제품 개발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기대했던 비용절감 효과뿐만 아니라 매출 증대 효과까지 발생했으며 주가는 혁신이 추진된 3년간 두 배로 올랐다.

복잡성 제거는 전사적 관점서 CEO가 추진
복잡성 증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 효과는 비교적 명확하게 보이는 반면 부정적 효과는 회사 전체에 분산돼 발생하므로 잘 보이지 않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제품 하나가 출시되면 R&D·구매·생산·재고관리·영업 부서까지 회사 전반의 업무가 증가하고 복잡성이 늘어난다. 그런데 제품 출시로 증가하는 매출은 비교적 명확한 반면, 조직 전반의 업무 부담 증가를 계량화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특성 때문에 회사 각 부문에서 제각기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제품을 늘리게 되는데 이게 회사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복잡성 문제를 올바로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정 기능이 아니라 전사적인 관점에서 비용과 효용을 따져 접근해야 한다. 한국의 많은 기업이 마케팅 또는 SCM(공급망 관리) 담당 임원 주도의 제품 합리화를 추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고경영자(CEO) 또는 최고재무책임자(CFO) 등 특정 기능 부문이나 사업 부문의 이해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고위층이 주도해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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