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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코펜하겐」을 찾는 관광객들은 첫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마치 동화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환상에 잠기게 된다.
어른들도 즐길 수 있는 유원지「티브리」, 장난감 같은 궁전의 위병대, 천변도로변에 위치한 유명한 인어상…. 과연「안데르센」의 고향답기만 하다. 특히 거리의 간판들은 한결같이「안데르센」의 세계에서 방금 빼내온 것들 같기만 하다.
왕관과 가는 줄 빵을 둥글게 구부려만든「디자인」의 빵집 간판이 있는가 하면,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못생긴 오리새끼』의 조각을 걸어 놓은 식당이 있다. 고깃간은 또 귀여운 돼지새끼 그림을 붙여놓고 있다.
이렇게「코펜하겐」의 간판에는 글자가 별로 없다. 상호를 밝힌 것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있어도 주로 그림「디자인」으로 표시한다.
서양에서는 간판은 17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에는 상점주인들은 예술적인 아름다움으로 손님을 끌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이때부터의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있는 도시일수록 재미있는「디자인」이 많다. 또 비슷한「디자인」도 많다.
녹십자 속에 저울과 뱀 그림을 부조시킨 약국간판, 「핑크」색의 돼지「마크」를 단 식료품점, 구둣가게의 장화그림, 열쇠가게의 열쇠「디자인」이 모든 것이 구미의 어느 옛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간판들이다. 그러면서도 나라에 따라 맛이 다르다.
영국의 고전적인 전아한 맛, 「뉴올리안즈」의 남국적인 이국정취에 넘치는 화려한 맛, 북국들의 다분히 동화를 담은 듯한 풍류 등은 모두 다르다.
물론「파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몽마르트르」의 언덕이나「생제르맹」거리의 옛 간판들은 하나 하나가 예술품 같기만 하다.
이래서 서양의 도시들은 아름답다. 어느 거리에서나 낭만과「유머」와 예술의 입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런 간판들 때문이다.
간판 속에서 관광객은 그 나라의 역사를 찾아내고 예술을 감상하고 그 나라의 민족성을 헤아린다. 그리고 다시 없는 공감을 느낀다.
그런 간판들이 서울에는 없다. 그저 대문짝 만한 글자들이 사람들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속악한「네온·사인」이 눈을 현란케 할 뿐이다.
이래 가지고서야 서울이 아름다와질 수는 없다. 백자의 나라, 5백년의 고도다운 정서며 아름다움이나 긍지란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서울의 거리에는 여전히 외래어로 멋없이 크게만 단 간판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것들이 사실은 외국의 관광객들의 발길을 돌리게 하고 있을 뿐이다. 서울의「이미지」도 더럽혀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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