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 땅의 큰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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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큰나무/고규홍 지음, 김성철 사진, 늘와출판사, 2만원

고규홍(43)씨는 나무가 좋아 나무와 산다. "나무와 함께 할 수 있는 삶이 이뤄지는 곳은 필경 사람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일 것"이라고 믿기에 나무 지키는 일에 나섰다.

10여년 근무하던 도시의 일자리를 버리고 충남 태안군에 있는 천리포 수목원으로 들어간 지 3년 여, 그가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나무를 찾아서 1천일을 헤맨 기록을 사진과 지도를 곁들인 책으로 묶었다. 그는 왜 큰 나무를 만나러 길을 나섰을까.

"이 땅의 큰 나무들은 우리들의 삶 깊이 감춰진 속살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세월의 풍상을 드러낸 채 오연히 서있는 나무는 곧 우리의 아름다움이었고 진실이었습니다. 나무를 찾아가는 길은 그래서 우리 삶의 알갱이를 찾아나서는 일이었습니다."

고씨가 사철 나무찾기를 통해 만난 큰 나무는 모두 2백여 그루가 넘었지만 이 책에는 27종 1백30여 그루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가 김성철씨와 지도를 꼼꼼하게 그린 눌와출판사 대표 김효형씨가 함께 한 즐거운 발품이 큰 나무 얼굴과 함께 펼쳐진다.

서신면 물푸레나무부터 남해 창선면 왕후박나무까지, 큰 나무들을 애정으로 훑어가는 이들 세 사람의 발길을 따라 나선 독자는 곧 큰 숲속에 들게 된다.

"넉넉한 품이 아름다운 느티나무는 계절마다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추위를 이겨내고 목련꽃이 화려한 외출을 시작하는 봄날, 파릇파릇 연녹색의 잎들이 앙증맞게 고개를 내밀 때부터 느티나무에는 생동감이 넘친다"로 시작하는 봄 느티나무 얘기는 "빈 하늘 한가득 강인한 생명력의 직선과 곡선들로 우리네 삶의 원초적 긴장과 이완의 들고남을 보여주는 듯하다"는 겨울 느티나무 설로 끝난다.

"소나무에서 엄격함이 느껴지고, 은행나무에서 까탈스러움이 느껴진다면, 느티나무에서는 너그러움이 느껴진다"는 비교론에 이르면, 나무를 사람처럼 대하는 지은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나무 품성론만이 아니다. 발없는 나무가 자리를 옮겨다니는 과정을 살펴 문화 교류의 흔적을 좆은 끝에 "백송이 있는 곳에는 '뼈대있는 가문'이 있었다"는 추론을 끌어냈다.

도인들이 꽂아둔 지팡이가 큰 나무로 자라났다는 전설을 말하면서 "천년 가까이 살아온 큰 나무라면 한꺼번에 표출해내는 기가 대단할 수밖에 없다"고 거드는 품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암나무가 수나무가 된 나무들의 성전환 같은 얘기도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지은이는"우리네 삶이란 은행나무가 바라보기엔 어쩌면 한갓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작은 흔적에 지날지도 모르겠다"고 쓴다.

그래서 "인생의 참뜻을 깨닫게 해줄 나무를 곁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불행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고씨의 나무 예찬은 한숨에 우리를 창밖 나무 쪽으로, 숲으로 데려간다. "나무에게 다가서는 길은 우리 사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끝내 지켜내는 슬기"이기 때문이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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