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베팅" vs 왕이 "선택" … 한국엔 압박이자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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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엽
정치국제부문 기자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을 처음 본 건 지난해 7월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때였다. 북·중 양자회의를 마치고 ARF 회의장으로 들어오는 왕이 부장에게 회의 결과를 질문했다. 왕이 부장은 준비된 확실한 어조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중국의 의지를 밝혔다. 왕이 부장은 “중국은 6자회담의 의장국으로서 유관국 간 대화 조건을 마련해 한반도 문제가 해결 궤도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말했다.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모범답안이었다.

 10개월 만인 지난 26일 한·중 외교장관회담 참석차 왕이 부장이 방한했다. 양국은 비공개 회의 후 본회담을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사진촬영을 위해 5분가량 언론에 회담이 공개됐고, 양국 장관은 회담의 핵심 메시지를 담은 ‘모두발언’을 했다. 이날 윤 장관은 ▶북한 핵실험 위협으로 인한 엄중한 한반도 정세 ▶한·중의 북핵불용 방침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언급했다.

 왕이 부장은 양국 관계의 발전을 강조했다.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했다. “새로운 지역 및 국제정세의 심각한 변화에 따라 우리는 한국을 더욱 긴밀한 협력동반자로 ‘선택’하고자 한다”였다. 이어 “함께 양국의 공동 발전 및 번영을 도모하고 한반도 평화를 수호하고 아시아 지역의 진흥을 같이 만들어나가자”고 강조했다. 장관급 회담에선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고른다. ‘선택’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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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 부장이 말한 ‘국제·지역 정세의 심각한 변화’는 미국의 본격적인 아시아 중시전략 및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추구 움직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 한국을 파트너로 선택할 테니 한국도 잘하라는 은근한 압박이 담긴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핵 등 한반도 평화에 중국이 역할을 할 테니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남·동중국해 문제에서 한국이 미·일 편으로 기울지 말라는 속내도 담겼을 것이다.

 왕이 부장의 발언을 듣는 순간 지난해 12월 미국 조 바이든 부통령의 ‘베팅’ 발언이 떠올랐다. 당시 바이든 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며 “미국은 계속 한국에 베팅할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중국의 일방적 방공식별구역 선포로 동북아 긴장이 고조되던 시점에 한·중 관계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것을 우려한 미국이 불만을 내비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국회 질의에서 “미국식 구어(口語)를 이해 못하는 쪽에서 오해를 한 것으로 통역이 정확하지 않은 게 있다”고 넘어갔다. 그러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지난 4월 방한 당시 본지 단독인터뷰(4월 25일자 1, 4, 5, 6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늘리고 건설적 관계를 맺는 건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다만 한국의 안보와 번영의 기초는 미국”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베팅’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 발언이다. 당시의 통역 논란이 떠올라 몇 번이나 당국자에게 왕이 부장이 ‘선택’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외교부 당국자는 “통역이 ‘선택’이라고 말한 것은 확실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둘러댔다. 바이든 부통령의 경우도 왕이 부장의 경우도 외교부는 통역 문제로 축소하고 뒤로 숨으려는 분위기다. 얼마 전 외교부 고위직을 지낸 인사를 만나 ‘베팅’ 발언을 물어보자 “말로 하는 전쟁터인 외교에서 그냥 하는 말은 없다”며 “단어 하나하나에 본심(本心)이 담겨 있기에 행간까지 읽고 준비하는 것이 외교”라고 강조했다.

 미·중이 각각 ‘베팅’과 ‘선택’을 언급한 것은 한국에 대한 압박일 공산이 크지만 동시에 한국의 ‘몸값’이 높아진 것일 수 있다. 단순히 ‘통역의 문제’라거나 ‘오해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지 말고 이를 기회로 활용할 전략적 대응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북핵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고 전략적 모호성을 통해 균형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외교부 혼자 행간을 읽고 발언의 의미를 숨기는 것보다, 혹은 별것 아닌 문제로 간주하고 넘어가는 것보다 집단적 지혜로 우리 외교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정원엽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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