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가 소개한 96세 할머니'63년 수절'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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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클라라 갠트(오른쪽 둘째)가 6·25 참전용사인 남편 조셉 갠트의 유해를 63년 만에 맞이하며 오열하고 있다. [로이터=뉴스1]

미국의 ‘현충일’인 26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메모리얼데이 연설에서 한국전쟁에 얽힌 아주 특별한 러브스토리를 소개했다. 주인공은 96세의 흑인 할머니인 클라라 갠트와 남편인 고(故) 조셉 갠트(사진) 중사였다.

 클라라는 1946년 텍사스 발 LA행 기차 안에서 갠트 중사를 처음 만났다. 당시 갠트 중사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남태평양 전선에서 훈장을 탄 모범군인이었다. 갠트 중사는 클라라를 보자 한눈에 반해 끈질기게 구애했고, 2년 뒤 결혼식을 올렸다. 클라라의 나이 27세, 갠트 중사의 나이 23세 때였다.

 꿈같은 신혼 생활을 보내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갠트 중사는 미 2보병사단 503포병부대에 지원했다. 전쟁터로 향하는 남편은 “만일 내가 전사하면 다른 사람과 재혼하라”고 말했다. 아내 클라라는 단호하게 “노(no)”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당신을 제외하고 앞으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50년 12월 남편은 전장에서 100달러 지폐를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갠트 중사는 군우리 전투에서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 실종자(MIA)로 분류됐다.

 전쟁이 끝난 뒤 하와이에 본부를 둔 미 국방부의 ‘전쟁포로·실종자 합동조사본부’는 한국전 전사자 유해를 찾기 위한 협상을 북한 측과 벌였다. 지루한 협상 끝에 마침내 갠트 중사를 비롯한 미군 유해를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갠트 중사는 북한의 포로수용소에서 51년 3월 27일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12월 성조기에 싸인 갠트 중사의 유해가 LA공항에 도착하자 클라라는 “남편이 돌아와 기쁘다. 이제 편히 눈을 감게 됐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사연을 소개한 뒤 “클라라는 남편과 한 약속대로 63년을 기다렸고, 이제 96세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곤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며 끝까지 집을 지킨 클라라가 오늘 이 행사장에 와 있다”고 소개했다. 60년이 넘는 기다림 속에 백발이 된 클라라 여사를 향해 알링턴 국립묘지에 모인 청중들은 30초가 넘는 긴 박수를 보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전쟁영웅들에게서 미국의 힘을 느낀다”며 “그리고 전쟁 미망인들의 사랑에서도 그 힘을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클라라 여사는 기자들에게 “나는 언제나 남편만을 사랑했고, 죽을 때까지도 그 사람의 부인”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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