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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과외 25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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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 서대문 A고교 2년 김현욱군(17·서울 서대문구 대조동)은 새 학기가 시작된 3월부터 새벽5시면 일어난다. 아침밥도 먹지 않은 채 책가방을 챙겨 서둘러 집을 나선다. 광화문 학원가에 새벽강의를 받으러 나가기 때문이다. 50분간의 새벽공부를 마치고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학교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7시40분 정도. 학교가 시작되기까지 20여분 시간여유가 있다. 학교앞 라면 집에서 아침을 먹는다. 두개씩 싸 갖고 다니는 도시락은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어 도시락을 라면국물과 함께 먹는 경우가 많다. 밥맛이 없을 때는 라면만 먹기도 한다.

<라면으로 "해장">
각 고등학교 주변에는 이처럼 아침밥을 설치고 나오는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라면집들이 꽤나 재미를 보고 있다.
라면은 한 그릇에 1백20원, 떡라면은 1백50∼2백원, 국물만 사먹으면 50원. 상당수의 학생들이 어른들처럼 『해장한다』는 말을 하면서 이른 아침부터 라면을 먹는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B군은 다시 종로구 낙원동쪽으로 나온다. 영어와 수학 2과목에 대한 본격적인 그룹지도를 받고있다. 이 과외가 끝나 집에 돌아오면 대체로 밤10시가 넘는다.
저녁밥을 먹고 l∼2시간 자습을 하다보면 밤l2시가 금세 넘어간다. 그래서 B군은 2학년이 된 후부터 하루 5시간밖에 잠을 못 자는 날이 많아졌다. 과외 때문이다.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는 지난해 12월 하순 어느날 오후 서울 종로의 어느 학원 대강의실에는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을 정도로 학생들이 꽉 들어차 열심히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시험과목은 수학 한 과목. 수험생들은 모두 정복차림의 고교 1년생들이었다. 이 학원출신 수학담당 선생은 과외계에서는 도사로 소문나 있다.

<뒤바뀐 주·부업>
그래서 학원강의보다 그룹지도 쪽으로 기울어져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과외를 맡고 있다. 이 선생에게 수학을 배우겠다는 지원자들이 많다보니 우수한 학생들만 몇 그룹 모아 가르치기 위해 시험을 치른 것. 대략 3백명 정도 몰려들었으니 가장 우수한 그룹(9∼10명)에 들기 위해서는 30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등학교 2학년만 되면 과외는 대학입시를 겨냥해 마냥 열기를 더해 가는 셈이다. 최근 YWCA가 주최한 공청회에 나온 어느 여고 2학년생은 『많은 학생들이 과외를 받고있으니 혼자 안하면 자꾸 뒤지는 느낌이 들어 불안하다』고 했고 여중 3년생은 『과외지도를 받은 학생들이 학교수업을 앞질러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과외를 받게된다』고 털어놓았다.
과외 중 가장 열기를 띠는 것은 그룹지도. 보통 9명이 한 팀을 만들어 선생에게 20만원을 모아주는 반면 l인당 20만원에 4∼5명으로 된 특수그룹까지 등장했다.
Y고 영어담당 L교사는 학생들 사이에 『20만원』으로 불린다. 그룹을 만들어 20만원을 거두면 과외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2년전만 해도 L교사는 과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물가는 치솟는데 쥐꼬리 같은 봉급으로는 먹고살기조차 힘들 것 같아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어느 것이 본업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과외전문이 됐다고 했다.

<월수 기백만원>
교사의 학교수업시간은 1주일에 28시간. 이밖에 과외 24시간을 합하면 매주 52시간의 강행군이다. 6팀을 맡아 하루 4시간씩 가르치는 수입은 월 1백20만원. L교사는 경력 11년의 9호봉. 연구수당까지 합해야 한달에 20만5천원을 받는다.
S여고 화학담당 K교사는 방과후 4개 지역에 흩어져있는 안방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난해에 승용차까지 샀다.
지난해 K여고 국어담당 K교사는 예비고사를 앞두고 「1개월 총 정리」라는 특강(?)을 했다. 자기학교 학생들만도 10명 10개 팀. 소문을 듣고 찾아온 남학생들에게도 같은 내용의 강의를 해주어 한달동안 3백여만원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그룹지도에서는 학생수가 9명을 넘지 않는 것이 상례로 돼 있었다.
학생수가 10명만 되면 사설강습소로 인정돼 단속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관계당국은 법령을 고쳐 5명 이상의 과외를 사설강습소로 단속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 학부모의 과외비 부담을 줄이고 학생들이 학교수업에 보다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취해진 조치라고는 해도 과연 이같은 방침만으로 번창일로의 과외열풍을 줄일 수 있을는지―.
『학교수업이 과외보다 떨어진다는 여론이 많아요. 과외를 하지 않고는 일류대학엘 들어갈 수 없는 실정인데 그룹지도의 한계를 5명 이내로 줄인다면 결국 학부모 과외비 부담만 두배로 늘어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고3 자녀를 둔 어느 어머니의 하소연이었다.
소위 특수그룹과외가 성행하게 될지 모른다는 성급한 걱정이었다.
평준화이후 과외가 성하다보니 각급 학교는 교사이직문제로 큰 골치를 앓게됐다. 어느 여고교장의 말을 들어보자.

<교사들 이직 늘어>
『선생 4명을 학원에 뺏겼어요. 교과서를 펴낼 수 있을만한 실력 있는 선생님들인데 학원측으로부터 막대한 스카우트 비용을 받은 것 같아요. 대우가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우수한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는 것은 가슴아픈 일입니다.』 우수한 교사들이 학원에 몰리다보니 세칭 일류학원이란 곳에는 대부분 과거 명문고교 교사들로 강사진을 구성하게 됐다.
그리고 학생들이 과외에 신경을 쓰다보니 학교생활이 점점 메말라 가는 것도 큰 문제로 등장했다. 『서로가 시간 여유가 없게 됐어요. 선생은 선생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뿔뿔이 흘어져요. 친구들간의 우정이나 사제간에 대화를 나눌 겨를이 없어요. 학교교육의 본질이 변질된다고나 할까요.』 용산고 김낙한 교사는 학교교육의 장래가 우려된다고까지 심각하게 지적했다. <전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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