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원형 현재모습과 다르다|배경수씨(부산시문화재위원) 주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최근 문화재관리국이 경주토함산에 또 하나의 모조 석굴암을 세울 설계도를 검토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그 원형을 원점부터 재검토하자는 이색적인 논문이 발표됐다.
부산시 문화재의원 배경수씨가 제기한 이 논문은 석굴암의 변조된 상황을 낱낱이 밝혀내는 한편 자기 나름의 원형을 그려냄으로써 현재 관리국이 내놓은 장기인씨 설계안을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렸다. 배씨는 지난2년간 석굴암내부를 엄밀하게 실측, 그 수치를 분석한 결과 정확한 좌우대칭으로 구성돼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정확한 좌우 대칭」은 통일신라 때의 건축이나 조각에 있어서의 기본적 상식. 그럼에도 석굴암 본존불의 광배가 왼쪽으로 치우친 점이라든가 「돔」주위의 제자상과 사천왕상의 배치도 조금씩 일그러져 있으며「돔」입구팔각왕도 마찬가지. 내부를 구성한 하나 하나의 부재가 한결같이 정확한 대칭의 위치에 놓여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창건당시에 사용된 척도를 살펴본 결과 당대척(우리나라의 곡척0.98)에 해당함을 알게 됐고, 그 척도와 비교할 때 현재의 석굴암이 얼마나 변조된 것인가를 확연하게 밝혀내게 된 것이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이래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그 중에도 특히 잘못된 부분은 1913년 일제가 수리하면서 대폭 변조했기 때문. 그래서 창건당초의 요소만을 간추려내는 일이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배 위원은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재료분석에 의하여 원형을 재현하는 시도로서 내관과 외관을 각기 구분해 탐색했다. 석굴암의 본시 내부구조는「돔」과 입구통로로 구성한 감실(불감)형식이 당초의 의도로 해석했다. 즉 사천왕상까지가 감실 내부가 되며 그 끝에 내비(현재 없음)를 설치했으며 인왕상은 외벽에 속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창건당시에도 예배공간으로서의 목조전실이 있었겠지만 전실 좌우벽의 신중상 석조물은 그 훨씬 뒤(고려시대?)에 보충한 첨가물로 보았다.
팔부신상의 조각은 기법상으로 후대에 속할뿐더러 감실외벽에다 무리하게 연결시키다보니 인왕상의 부조에 많은 손상을 입히고 있다.
석굴암의 원래 외관은 목조건물의 법당으로 보여 마치 충북 중원부 미륵당리의 석굴과 대동소이한 형용이었을 것이라고 배씨는 가정했다.
그것은 일제 수리 전의 사진에 나타나 있듯이 목조전실이 없을 때는 좌우로 석벽이 뻗쳐 있었으리라는 것. 석굴암을 하나의 대형감실로 본다면 감실입구 석문(현재 전실 안쪽의「아치」형 석조물)에는 판비가 달려 여닫게 되어야 마땅하다. 전실은 한갓 예배공간으로 「둠」안의 불상을 가장 거룩하게 뵐 수 있는 자리(제2 신중상 앞)이며 그 장소에서 불상을 봤을 때 그 얼굴과 광배의 후광이 가장 거룩하게 보인다는 점도 밝혔다.
사륙배판 1백여「페이지」나 되는 이 논문은 배씨가 최근 동아대 석사학위과정 논문으로 제출한 『토함산 석굴암에 대한 소고』. 그동안 국내외에서 이 석굴암에 대한 글은 적지 않게 발표됐지만 원형복원의 시도로는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아직 석굴암의 원형과 복원의 한도를 정하지 못한 채 모조석굴암의 건립을 서두르고 있는 문화재관리국에 대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검토할 것을 촉구하는 구실을 할 것으로 내다보인다. <이종석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