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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 지식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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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배가 침몰한 재난 상황에서 그 안에 갇힌 아이를 국가에 구조해 달라고 하는 것이 국민으로서 정당히 할 수 있는 요구 아닙니까?” TV 뉴스에서 본 실종자 가족의 절규를 들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무능한 정부에 무능하다고 그들과 함께 말하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1990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삼당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이루고 통합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을 때 나는 KAIST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군정종식을 위해 싸웠던 반독재 민주투사인 김영삼이 삼당합당을 한 것에 반대해 나는 선배들을 따라 동맹휴업을 하고 시위에 참가했다.

 그때 우리 학교 보직교수가 확성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너희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공부하는 KAIST 학생들이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본분을 저버리고, 이렇게 반정부 시위에 참가하는 건 부적절하다. 너희가 정부라면 반정부 시위를 하는 학생들이 모인 우리 대학에 지원을 하겠느냐?”

 이 질문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25년간 과학자로 살아오면서 숱하게 들어온 말이다.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몇 년 전 실제로 불이익을 당한 후론 부끄럽게도 사회적 발언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 달 전 우리 국민은 470여 명을 태운 세월호가 서서히 침몰하는 끔찍한 악몽을 경험했다. 게다가 선장과 항해사, 기관장 등은 승객들을 외면한 채 탈출했고, 탐욕에 눈이 먼 선주는 평형수를 버리고 화물을 과적해 참변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재난 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적절했다. 매뉴얼은 무용지물이었고, 생존자와 사망자 확인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가 안전 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슬픔을 통감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는 책임감 있는 리더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침몰 상황에서 승객들은 안전하게 지시를 따르고 질서 있게 행동했다. 아비규환 상황에서 서로 탈출하려고 밟고 밟히는 후진국형 재난을 일으킬 만큼 미개하지 않다. 정작 선장과 항해사들은 자신들이 제일 먼저 탈출할 만큼 리더로서의 자질과 역할이 선진국 수준이 못 됐다.

 사고 후 대한민국 정부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민간 어선과 잠수부는 구조를 도왔고, 자원봉사자들은 진도에 내려가 실종자 가족들의 옷가지와 먹을 걸 챙겼다. 재난에 대한 국민의 요구와 태도는 선진국 수준이지만, 정부의 태도는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한다. 자괴감이 드는 건 이 다음부터다. 국가 안전 관리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부실하고 대재난에 대한 국가 리더의 태도가 매우 부적절할 때 국민은 국가에 책임과 재발방지를 요구해야 한다. 아직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다면 고함을 질러야 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시민은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하다.

 예전 같으면 제일 먼저 일어섰을 대학생들이 침묵한다. 희망 없는 시대에 취직 준비로 바쁜 그들은 사회를 들여다볼 여력이 없다. 나라의 어른으로 시대의 스승으로 일성을 질러 주셔야 할 원로들도 침묵한다. 정부를 견제하고 권력을 비판해야 할 언론은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정부를 질타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야당은 존재감이 없다. 그들이 지방선거를 위해 주판알만 튕기다 보니 국민이 의지할 구심점이 없다.

 국민의 혈세 수조원으로 4대 강을 개발한다는 명목하에 결국 자연을 파괴하는 데 그쳤을 때에도 시민들은 냉소적이기만 했다.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 때도 다수는 침묵했다.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한 건 소수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나는 그들만 못하다.

 TV 뉴스를 보면서 다시 대학 시절 시위가 떠오른 건 뮤지션 이승환 때문이다. 그는 40대에 접어들어 생긴 꿈이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거”란다. 내가 속한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이익, 특히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기에, 그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정의롭게 살기 힘든 이 시대를 오랫동안 방치해 온 비겁한 기성세대로서의 나를 반성한다.

 다시 대학 시절로 돌아가면, 그때 그 보직 교수에게 당당히 말하고 싶다. 세금은 정부가 주는 게 아니라 국민이 주는 것이라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함께 대변해 주는 국민이 사는 나라에서만 정부도 정의로워질 수 있다.

 스승의 날을 맞아 연세대 교수 131명은 “스승답지 못한 우리 모습을 돌아보며 겸허히 반성하고 참회하고자 한다”며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을 존경하며 나 또한 같은 마음이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