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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기업에 도사린 전근대성은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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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나라 소비자들이야말로 동네북의 신세이다. 기업의 궂은일을 하나같이 뒤치다꺼리 해주고 있다.
수년 전 국내 면방 업계는 커다란 과오를 저질렀다. 국제 원면 시세 추세를 잘못짚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됐다. 「파운드」당 70「센트」에 원면을 대량 구매했으나 그 이후 값은 폭락을 거듭, 74년 12월에는 37「센트」까지 떨어졌다. 비싸게 주고 산 원면의 처리 방안에 고심하던 이들은 국내 면제품 값의 인상을 끈질기게 추진했다. 결국 국제 시세는 떨어지는데도 국내 면제품 가격은 올라가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소비자는 동네북>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국내 업계는 공급 과잉 현상이 일어나면 예외 없이 「덤핑」수출에 나선다. 국내 가격과 비교하면 터무니없는 값으로 수출 계약을 체결한다. 자동차 수출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대당 20만원의 결손을 보고 있다고 회사측은 말한다.
그러나 결코 이 같은 손해를 기업이 뒤집어쓰는 법은 없다. 국내 판매가에서 이를 보전하게 마련이다.
시멘트·철강·비료 같은 품목은 한때 공판 회사를 만들어 공공연히 내수 판매에서 일정액을 떼어 내어 수출 결손 보상금으로 지급하기까지 했다. 국내 유류가를 보면 소비자들은 취약한 재무구조에서 오는 과중한 금리 부담까지를 떠맡고 있다. 기름 회사들의 차관액은 자본금의 6배 내지 20배에 달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호유에 투자한 외국 투자가는 76년 중 8백14만「달러」를 과실 송금해 갔다. 차관에 따른 원리금 상환을 제외하고도 이만한 과실 송금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유류가가 비쌌다는 얘기가 된다. 과실 송금액의 상당액을 재무 구조 개선에 사용했다면 이자 부담은 경감될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제품 값의 인하 요인이 생겼을 것을 감안한다면 국내 소비자들은 2중으로 망하고 있다는 감을 금할 수 없다.

<비경쟁 품목 횡포>
그러나 이런 요인 때문만으로 국내 제품가가 외국에 비해 비싼 것은 아니다. 국내 가격은 항상 당해 업계 중 모든 조건이 나쁜 업체를 기준으로 해서 결정된다. 한계 기업을 구제해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업계는 곧잘 「카르텔」을 형성해 가격을 협정하곤 한다. 차관 상환 기간이 다 끝났어도 새로운 기계 설치로, 생산성이 향상됐어도 가격은 떨어질 줄 모른다.
이 같은 가격의 하방 경직성은 몰론 국내 주요 상품의 대부분이 경쟁 원리가 배제된 관리 가격 체제 밑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73년 경우 경쟁 상품의 연간 상승률(도매 물가 기준)이 26.9%인데 반해 비경쟁 상품의 그것은 60.4%로 2배가 넘었던 것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독과점 상품의 선도로 물가가 계속 뛰자 정부는 공정거래 및 물가 안정에 관한 법을 제정 독과점의 폐해 규제에 나섰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로 76년 중 처음으로. 비경쟁 상품 가격 상승률은 경쟁 상품보다 낮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정부의 통제를 피한 「초컬릿」상법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초컬릿」가격을 통제했더니 가격은 올리지 않는 대신 그 두께가 얇아지더라는 데서 미국에서 이름 붙여진 「초컬릿」상법은 어느 틈에 국내 기업의 애용물이 돼 버렸다. 신제품이라고 이름만 바꾸는가 하면 포장을 변경하고 원료 배합에 있어 함량을 줄이는 식의 변칙 인상이 판을 치고 있다.

<상표 선호 뚜렷>
이 같은 수법은 그러나 소비자들의 무지에 가까운 상품 지식을 전제로 할 때 성립된다. 이제까지는 통용됐다고 이러한 횡포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다 보는 것은 오산이다. 소비자들의 인식은 최근 각종 「매스컴」의 영향으로 급속히 성장되고 있다. 강력한 압력단체로까지 부상하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점차 상표를 선호하는 경향은 뚜렷해지고 있다.
이것이 누적되면 조만간 기업의 「이미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소비자들은 그들을 무시하는 기업은 외면하게 될 것이며 성실히 봉사하는 기업만을 키워 나갈 것이다.
기업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데는 모든 책임을 기업 스스로가 질줄 안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지름길이며 기업 경영의 사활은 앞으로 이점에 귀착된다고 볼 수 있다. <이강훈 기자><끝>

<전문가의 의견>소비자 단체 육성·기업 독주를 막아야|이규억(KDI수석연구관)
소비자의 일방적 희생을 막을 길은 현재로서는 행정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정부는 독과점 체제의 특성인 가격의 하방 경직성을 타파하는 보루의 역할을 해야 하며 원가 인하 요인이 발생했으면 가격을 떨어뜨려야 마땅하다. 가격의 연쇄 인상이라는 악순환을 단절키 위해 기초 산업의 가격은 단순히 원가 상승 요인이 발생했다. 올릴 것이 아니라 당해 기업의 전체 수지면을 고려, 인상을 억제하는 등 상품의 특성에 따라 가격 정책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장기적으로는 시장 구조를 유효 경쟁 원리가 적용되도록 개선해 나가야 하며 소비자 단체를 육성, 기업의 횡포에 대항 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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