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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 승방의 송은영 스님「적 치하의 서울」을 말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6·25」의 상처는 특히 성직자들에게는 신을 거부하는 공산주의의 비리를 겪어야 했던 아픔이 더욱 컸던 것이다. 27년 전 공산적지에서 성직자로, 또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수난의 기록들이 최근 수녀와 여승의 손으로 쓰여져 화제가 되고 있다.
6·25의 아픔은 온 국민의 어디에나 피맺혀 있지만, 1백여 명의 여승들을 거느렸던 여 주지에겐 또 다른 한이 두고두고 그 가슴을 찢는다.
서울 탑골 승방(보문사)의 송은영 스님(68·보문사 주지)은 그때의 일기를 새삼 정리해 이 민족의 증언으로 남기려 했다. 하지만 너무도 가슴아마 출판을 단념키로 했다고 서두를 연다.
『l·4후퇴 때의 일이지요. 서울에 다시 내려온 북괴군은 굳게 잠가 놓은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 총부리를 들이대며 20도 채 안된 애들(여승) 두 명을 감쪽같이 납치해 갔습니다.』
26년 전 동란 때의 수난을 회상하는 송은영 스님은 말문을 열면서부터 눈물이 맺혔다. 은영 스님은 절을 지키겠다는 일념에서 상좌들의 간곡한 권유를 끝내 뿌리치고 피난길에 나서지 않았다.
『북괴군은 법당 앞마당에 말을 들여 매 놓고는 방들을 군대숙소로 사용해 야겠으니 내놓으라는 거예요. 우선 방에 불을 넣어 데워 놓을 테니 내일오라고 사정해 가까스로 보냈지요.』
은영 스님은 북괴군이 들겠다는 방에 불을 지피는 대신 호미로 방 모서리를 모두 파 놓아 버렸다. 이튿날 돌아온 북괴군들에게 방이 터져 못쓰겠다며 연기가 자옥한 방을 직접 보여줘 북괴군 숙소가 될 뻔한 위기를 모면했다.
은영 스님은 전쟁 초 피난을 못하고 당한 고초 때문에 1·4후퇴 때는 1백 여명의 비구니를 모두 대구로 내려보냈다. 그랬더니 여승 6명은 막무가내로 남아서 모시겠다고 떨어졌다. 그게 도리어 은영 스님에겐 짐이 됐다.『숙소 문제로 감정이 상했던 북괴군은 저녁밥을 짓고 있는 19세의 비구니 2명을 대문 틈으로 지켜보다가 불시에 납치해 가 버렸습니다. 뒤늦게 알고 좇아가 애원해 봤지만 북으로 데리고 가 공부(?)를 잘 시킬 테니 걱정 말라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은영 스님은 밤새 눈물을 흘리며 좌선을 했다. 부처님의 자비가 내리셨음인지 다음날 저녁 때 두 여승은 절름발이·벙어리 행세를 해 돌아왔지만 그런 납치만행은 끊이지 않았다.
동란이 터지던 여름한 사람도 피난을 못간 채 남아 있던 탑골 승방 비구니들이 당한 수난도 눈물겨웠다. 절간은 임시병원으로 쓰려 했고 여승들은 여자 의용군의 만만한 대상이었다. 젊은 비구니들을 여자 의용군으로 강제 징발하려는 북괴군의 공작은 아주 집요했다. 우선 여성 동맹에 가입하기를 강요했고 그 다음 부상병의 뒷바라지를 하라는 강제부역에 시달렸다.
대문을 걸어 잠그면 걷어차고 들어와 샅샅이 뒤져 대는 북괴군 등쌀에 젊은 비구니들은 하수도·마루 밑 등에서 거의 숨어살았다. 노스님들만 몇 명씩 나가 청량리역에서 부상해 올라오는 북괴군 병사들을 전차에 옮겨 실어 주곤 했다는 것.
은영 스님은 이 역경 속에서도 절 뒤 산 속에 숨은 연지동 동회 장을 돌봐 준 숨은 얘기도 있다. 『매일 새벽 내방으로 밥을 얻어먹으러 왔어요. 저녁에는 호박죽만 끓여 먹었기 때문에 전날 아침밥을 반만 먹고 남겼다가 주었습니다) 어느 때고 전쟁의 아픔은 여성이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는 것이지만 그 무력한 여승들을 도심에서 감싸고 있어야 했던 은영 스님은 이제 회상하기조차 역겨운 참상이었다고 말한다. <이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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