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권 없는 출판사에의 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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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 검인정교과서 부정사건의 수습을 위해 내린 몇 가지 불합리한 행정조치는 시정돼야 한다.
교과서 생산과 공급을 국정교과서 회사에 넘겨 사실상 문을 닫은 상태인 검인정회사에 일반 주주들로 하여금 다시 증자 자본금을 내도록 한 조치는 마치 밑빠진 독에 물을 붓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모순된 처사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모순은 사건의 뒤처리를 맡은 문교부와 국세청 등 관계부처가 서로 출판문화 육성을 위한 정책적인 배려와 횡적인 협조관계 없이 각각 소관부처를 위해 유리한 입장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하기 때문에 빚어진 듯하다.
문교부는 내년도 교과서의 적기공급이 당면과제이지, 검인정회사나 지주 출판회사가 도산되는 것은 아랑곳없다는 자세이고, 국세청은 수사결과 드러난 1백27억 원의 탈세액을 제때에 추징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이자, 이 때문에 지주출판사가 파산, 우리 나라 출판 문화계가 사실상 폐문을 당하는 것도 관심 밖의 일이라는 듯 서로 상반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은 국가정책을 수행하는 정부 부처간에 취할 옳은 자세는 아닐 것이다.
검인정사건의 후유증으로 뜻 있는 국민과 관계자들이 우려하는 출판업계의 도산 위기를 구제키 위해서는 검인정 회사에 교과서 발행권을 다시 주어 영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 후 주주들이 출자, 회사를 육성토록 하든지, 아니면 법대로 지주회사에 유한책임을 물어 한 상사법인인 검인정회사의 자산만으로 탈세액을 추징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검인정 지주회사들이 6월말까지 내야할 증자금은 1백27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이 출자금은 국세청이 사건 수사결과 추징키로 한 탈세액과 맞먹는 금액으로 탈세 추징금과는 관계없이 지주회사들이 검인정회사를 계속 운영, 육성한다는 명분으로 내놓기로 한 회사운영자금이기 때문에 출자대상인 관계회사가 사실상 문을 닫은 처지에서 선뜻 거액을 내놓을 업자가 있을지 의문이다.
더구나 1백27억 원이라는 거액을 6월말까지라는 짧은 기한부로 출자토록 한 국세청의 처사는 사건의 성질에 비추어 다분히 응징적인 성격인 것으로 그 취지를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더라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는 격의 가혹한 것이라는 평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소유재산이라야 얼마간의 건물 집기, 그리고 출판물의 지형밖에 없는 이들 지주출판사들에 평균 5천만원 내지 1억원, 최고 5억원대에 달하는 자금을 2∼3개월의 짧은 기간에 내도록한 처사는 아예 회사 문을 닫고 나서 빚을 얻어 그 뒤치다꺼리를 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검인정지주회사들은 사건 후 국세청이 탈세액을 추징할 수 없게 되자 지주회사 대표들을 불러 검인정회사의 영업권을 보장할 터이니 회사를 재건해 추징금을 떨 수 있도록 증자를 종용해왔던 것이며 주주들도 이를 받아들여 회사건물 등 부동산을 처분해서라도 주식지분 비율에 따라 부과된 증자 금을 낼 작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교부는 국세청의 시책과는 달리 검인정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교과서 지형을 국정교과서 회사에 넘겨주도록 함으로써 회사를 사실상 폐쇄시킨 일관성 없는 처사 때문에 대부분의 지주출판사들이 출자의욕을 잃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음은 이 나라 출판문화의 붕괴를 걱정하는 나머지 이 사건의 원만한 수습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을 크게 실망시키는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검인정사건을 합리적으로 수습하려는 관계부처는 검인정회사의 지주출판사들이 이 나라 신간출판과 양서출판을 맡고 있다는 중견회사들이며, 또 그들이 수행한 문화·사회적 공헌을 참작, 업계의 도산 위기를 막고 소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방향에서 최선의 대책을 성안해 줄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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