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은 추억 박물관 … 역장님의 이야기보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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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희채 대구역장은 그 지역 역사에 상상력을 보태 아름다운 기차역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대구역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박 역장. [사진 대구역]

기차역은 만남과 이별의 공간이다. 벌써 100년을 넘긴 곳이 숱하다. 역마다 가슴 절절한 사연 한두 가지가 있을 법하다.

 최근 들어 ‘안동역에서’란 가요가 인기를 얻고 ‘대전부르스’가 오랜 기간 사랑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코레일 박희채(58) 대구역장은 자신이 거쳐간 기차역에 그런 스토리텔링을 입혀 온 소설가다. 2010년부터 그가 만든 기차역 이야기는 인터넷을 타고 역사적인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는 안동역장으로 있으면서 두 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어느 독립운동가 역무원의 사랑이야기’와 ‘안기찰방 김홍도’가 그것이다. 역무원 이야기는 안동역사에 서 있는 연리지 벚나무를 소재로 만들어졌다. 벚나무 주변에는 신라시대 오층 전탑과 당간지주가 있다. 광복을 이태 앞두고 겨울밤 한 역무원이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한 처녀를 목격한다. 그는 플랫폼에 쓰러진 처녀를 역무실로 업고 와 정성스레 간호한 뒤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며칠 뒤 처녀는 고맙다며 역무원을 찾아왔고 그렇게 사랑이 시작됐다. 두 사람은 오층 전탑 주위를 거닐고 사랑을 약속하며 벚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얼마 뒤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갑자기 그 역무원을 쫓기 시작했다. 역무원은 비밀 독립운동단체의 단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한다.

 안동을 지나는 중앙선은 1941년 개통됐다. 박 역장은 “안동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사실과 연리지를 배경으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창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을 전 국회의원은 이 이야기를 사실로 착각해 “널리 알려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안동에서 조선시대 역마를 관리하던 찰방직을 지낸 화가 김홍도 이야기도 역사에 상상력을 보탰다.

 점촌역장을 할 때는 ‘강아지 명예역장’ 이야기를 만들었다. 기차역을 찾는 아이들을 위해 강아지 명예역장을 둔 걸 두고 일본의 고양이 명예역장을 모방한 것이라는 비난이 일 때였다. 그는 향토사를 넘기다가 곽재우 장군과 얽힌 문경새재 개 무덤과 서낭당을 발견했다. 그는 설화를 바탕으로 강아지 명예역장 이야기를 창작했다. 탤런트 최불암씨는 점촌역에서 그 이야기를 접하고 감동했다고 한다. 또 상주역장을 할 때는 자전거 선수 엄복동 이야기를 상주역과 연결지어 버무렸다. 눈꽃열차를 운행하는 봉화 승부역에는 사랑의 자물쇠 이야기를 만들었다. 때가 되면 대구역에도 애틋한 사연을 입힐 생각이다.

 박 역장은 “기차역은 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추억의 박물관”이라며 “스토리텔링을 통해 승객들이 한 번 더 기차와 기차역을 돌아보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 사연은 코레일 경북본부가 2010년 펴낸 『기차역 이야기』에 처음 실렸다. 코레일은 다시 전국에 철도 스토리텔링을 공모했고 이를 묶어 지난해 한 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올해로 32년째 철도에서 일하는 박 역장은 1994년께 대구일보 등 3개 지방지의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지난해는 고려 말 무관 김양검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 『동동』 두 권을 펴냈다.

대구=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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