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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아침 엄마와 함께 읽는 동화|목마를 타고 날아간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예쁜 계집 아이 있으면 좋겠어요.』엄마는 점점 간격을 좁히며 찾아오는 아픔을 참기 위해 뜨개질 감을 집어들며 말했습니다.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냐? 순산이나 하면 더 바랄게 없겠다. 하필 섣달 그믐날밤에 애를 낳다니. 게다가 애비는 이런 때 출장을 갈건 뭐냐. 』할머니는 쯧쯧 혀를 찼습니다.『새벽까진 꼭 돌아오겠대요. 그인들 가고싶어 갔겠어요? 어머니, 애들이 이불이나 차 던지지 않았는지 좀 보아주셔요』할머니는 마루를 건너 명이와 현이가 자고있는 방에 들어가 이불 귀를 꼭꼭 여며주고 현이의 불둑한 볼에 손가락을 넣어 사탕을 꺼내었습니다.
「자는 얼굴들이 어찌 그리 쌍동이처럼 똑같은지 원. 어느 녀석이 큰놈이고 어느 녀석이 작은 놈인지 모르겠더라.』
불을 끄고 나온 할머니는 흐물흐물 웃었습니다. 엄마도 덩달아 웃었습니다.
「이히히, 이히힝」
말이 우는소리에 명이는 잠이 깨었습니다. 낮은 소리로 부드럽게 응석부리는 듯한 소리는 바로 창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어요. 명이는 일어나 불을 켰습니다. 안방에서는 할머니의 말소리에 섞여 아픔을 참는 듯한 엄마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방문을 열고 할머니를 부르려다가 명이는 문득 오늘은 조용히 해야한다.
현이와 싸우거나 담장에 올라가거나 친구들을 불러와도 안돼요. 말썽장이들이 있는 집에는 동생이 오고 싶어하지 않으니까>하던 할머니의 말을 생각해내곤 살금샅금 책상 위로 올라갔습니다. 책상 위에서도 발돋움을 하여 창 밖을 내다보니 말도 보이지 않고 말의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명이는 불을 끄고 누웠습니다.
그러자 다시 이히힝 하는 말의 울음소리와 발로 툭툭 망을 차는 소리까지 틀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명이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불을 켜지 않고 더듬더듬 책상위로 올라가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명이는 하마터면「야아」하고 소리를 칠 뻔했습니다. 창밖에는 늘 어린이 놀이터에 세워져있던 큰 목마가 어서 나오라는 듯 사뿐히 서서 코를 불고 있는게 아니겠어요? 명이는 드르륵 창문을 열었습니다.
『네 동생을 데리고 가는 길이야, 함께 가지 않겠니? 아무도 몰래가야 해.』목마가 말했습니다.
「몰래 나갈 수가 없는 걸」
『네가 겁을 내고 있기 때문이야.』
내일이면 명이는 여덟살 반이 됩니다. 겁보로 보인다는 것은 못견딜 노릇입니다.
『잠깐 기다려. 현이도 갈 수 있니?』
「물론이지」 새벽까진 틀림없이 올 수 있어. 네 예쁜 동생을 데리고 말야.』
명이는 현이을 흔들어 깨우며 소근거렸어요.
『현이야 ,일어나. 아기를 데리러 가자.』
그러자 벽시계 안에서 졸고 있던 뻐꾸기가 푸르륵 창을 타고 날아가 목마의 귀에 앉았습니다.
명이와 현이도 차례로 창틀을 뛰어넘어 목마의 등에 올라탔습니다.
목마는 높은 소리로 한번 울고는 방을 박차고 날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목마는 이내 붙빛이 별처럼 박힌 도시를 지나고 빈들을 지났습니다. 얼어붙은 강은 거울처럼 차갑게 빛나고, 언덕 위의 교회를 지날 때 그 때까지「크리스머스·트리」에 남아있던 금종 은종들이 쟁그랑 쟁그랑 맑은 소리로 울었습니다. 어두운 숲을 지날 때 앙상한 나무들이 회초리같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욍욍 울었습니다.
『너희들 무섭지 않니?』
뻐꾸기가 울었습니다.
「우린 이렇게 같이 있단다.」나무들이 윙윙 합창하듯 대답했습니다.
「늙은 나무 둥지에는 새들이 살고.』
떡갈나무가 말했습니다.
「뿌려 밑에서는 뱀과 개구리가 잠자고.』
물푸레나무가 말했습니다.
「뿌리 단단한 껍질 속에서는 새 움이 자라지.」
백양나무가 말했습니다.
아주 긴 강을 건너자 강 언덕에는 골기 없을 듯 넓은 갈대발이 나타났어요. 싸리 꽃 같기도 하고 아주 부드러운 흰 안개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흰 갈꽃들이 손짓하듯 조용히 흔들리며 날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긴 어디니?』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는 곳이야.』
목마가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더 날았는지 모릅니다. 갈대밭이 끝나는 언덕을 넘어 이번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꽃들이 용단처럼 깔린 꽃밭에 다다랐습니다.
목마는 꽃들을 다치지 않도록 살그머니 내려앉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다 왔다. 여기는 생명의 꽃밭이야. 모두 앞으로 태어날 생명들이지. 여기서 내 동생을 데려가야 해.」
명이와 현이는 나란히 꽃밭에 들어섰습니다. 갓 순이 돋아 오르는 꽃나무, 망울이 전 꽃송이, 활짝 핀 꽃송이들. 어느 것이나 다 싱그럽고 향기로왔습니다. 명이와 현이는 마치 자기를 데려가 달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바라보는 분홍빛 꽃을 몰라 몸에 안았습니다.
목마는 다시금 꽃밭을 지나, 갈대밭을 지나, 긴장을 건너 쏜살같이 달렸습니다. 어두운 숲을 지날 때 뻐꾸기는「안녕」하고 외쳤습니다. 나무들도「안녕」하고 대답했습니다.
빈 들을지나 도시에 닿자 아직 어두운 하늘의 한 귀가 흩날리는 눈발 속으로 청남 빛으로 틔어오고 남쪽으로부터 밤새워 달려오는 장난감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기차가 보였습니다.
『아, 아빠가 타고 오시는 기차다』
현이가 외쳤습니다.
기차가 한강철교를 지날 때 아빠는 차창에 앉은 성에를 입김으로 눅이며 흩날리는 눈발너머로 무엇인가 흡사 여름날의 번개처럼 하얗게 하늘을 가르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커다란 새 같기도 하고 살별 같기도 했습니다. 설날 아침에 집에 돌아오기 위해 서둘러 출장 일을 마치고 밤새밤새 기차를 타고 오느라고 한숨도 자지 못한 아빠는 강 건너의 이미 새벽빛에 힘없이 바래지는 불빛들을 보며 비로소 눈을 감습니다. 그 무수한 불빛 중의 하나가 가족들을 편히 지켜 주리라는 안도감 때문이지요.,
목마는 사뿐히 마당에 내려앉아 명이와 현이가 내리기 쉽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고맙다. 목마야. 내일도 와 주겠니?』
『아니, 이제는 오지 않을거야. 다른 집으로 가야 하니까.』목마가 잠깐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뻐꾸기는「안녕」하고는 열린 창으로 날아 들어가 벽시계속에 들어앉고 시계는 비로소 똑딱똑딱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엄마는 소원대로 살빛이 분홍빛으로 곱고 눈이 구술처럼 영롱한 계집아이를 낳았습니다. 목욕물을 가지고 들어온 할머니는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눈이 푸짐하게 내렸더구나. 좋은 징조야.』
엄마의 눈에도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지난밤이 유난히 고요했던 것은 눈이 오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글 오정희. 그림 이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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