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파리」 악단 「바그너」와 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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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파리」의 「가르니에」궁에서 지난 6일 막을 올린 「바그너」의 「라인」강의 황금』 공연은 1세기만에 이루어진 「파리」와 「바그너」의 화해로 평가받을지도 모른다. 「폴란드」의 「쇼팽」이 「파리」에서 성공해 묻히기까지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바그너」는 「독일의 침략 근성과 똑같이 취급당해」 예술의 도시 「파리」의 배척을 당했던 것이다.
「바그너」가 「파리지엥」을 음악적으로 정복하기(?) 위해 「파리」에 처음 왔던 것은 1839년 나이 26세 때. 물론 당시 이 젊은 음악가에게는 빵이 급했다. 그의 모든 걸작들은 퇴짜를 맞았고, 『유령선』만이 천신만고 끝에 싼값으로 팔렸을 뿐이다.
그가 「파리」로부터 결정적인 모욕을 받은 것은 1859년이었다. 46세의 「바그너」는 두 차례의 실패를 거울삼아 「나폴레옹」3세의 각료였던 「에멀·오리비에」의 협력을 받아 황제 자신이 「파리·오페라」에 『탄하우저』를 공연하는 명령을 내리도록 공작을 한후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국수주의 단체인 「조키·클럽」의 정치적 음모로 인해 두 번만 『집어 치워라』는 아우성 속에 간신히 연주한 다음 중단되고 말았다.
1871년 보불 전쟁으로 「프랑스」는 「알사스·로렌스」 지방을 뺏기는 패배를 당했다. 「바그너」가 보복(?)의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항복』이란 음악을 작곡, 「파리지엥」의 불행을 예술적으로(?) 짓밟았다.
「나치」 패전 이후 30여 년이 흘렀지만 누구 하나 감히 「바그너」를 연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파리지엥」들은 반독 감정 때문에 그 동안 하나의 음악 세계를 잃었던 것이다. <파리=주섭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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