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직의 바둑 산책] 체력 다진 이세돌 '쎈돌'로 다시 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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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오른쪽)의 손이 2국의 승부처 근처에서 멈춰 있다. 박정환 9단(왼쪽)의 실수를 지적하는 이 9단의 안타까움과 박 9단의 자책이 들린다. [사진 한국기원]

이세돌이 일어섰다. 이세돌(31) 9단이 랭킹 1위 박정환(21) 9단을 누르고 제2의 전성기를 예고했다.

22일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15회 맥심커피배 결승 2국에서 이 9단은 박 9단에게 169수 흑 불계승했다. 지난해 맥심배 0대2 패배를 설욕하면서 6~8회 3연패에 이어 대회 네 번째 우승을 이뤘다. 박 9단에게는 1월 제32회 KBS바둑왕전의 2대1 승리에 이어 속기전에서만 두 번 연속 이겼다. 역대 전적도 이 9단이 12승 6패가 됐다.

 이 9단의 우승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바둑계에 의미가 크다. 속기전 우승은 체력적으로도 밀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3시간, 4시간 장고바둑이 더 많은 체력을 필요로 하지만 집중력 또한 체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속기전에서 10년이나 어린 후배의 도전을 이겨내기란 대단히 어렵다. 이 9단의 체력 안배가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이 9단은 3월 30일 구리 9단과의 10번기 3국 패배 후 “앞으로는 체력 안배에 신경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건강한 체력은 정신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체계적이고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기사의 인생주기(life cycle)가 짧아졌다. 20대 말이면 에너지가 거의 다 소진된다. 정상급이든 신예든 별 차이가 없다. 바둑계의 조로 현상은 과도한 경쟁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신예들의 안이함도 원인이다. 적당한 성적과 적당한 수입에 만족하는 세태다. 바둑계로서는 아까운 자원들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장면이다.

 이세돌의 재도약이 반가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최근 이 9단은 국가 상비군 기술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9단이 먼저 기술위원을 제안했다. 자신의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 싶다 했다. 그는 1년 전부터 신민준 초단을 개인지도하고 있다. 어린 프로들에게 순간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책 백 권보다 낫다. 불교 선종의 한 마디 할(喝)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중국과의 경쟁에 이세돌 먼저 분발하는 모습이다.

 국내 첫 랭킹 점수 1만 점을 바라보는 박 9단에게 이번 패배는 다소 충격적이다. 1국에 이어 2국도 초반 유리한 바둑을 중반에 들어와 스스로 망쳤다. 급하게 마무리하려는 태도가 엿보였다. 이 9단은 “승부를 의식해 심리적으로 다소 조급했던 것 같다. 박 9단의 바둑은 이제부터 개화할 것”으로 말했다. 자신도 21살쯤에야 제대로 눈을 떴으며 경험과 체력이 의욕과 조화되는 시점이 있다고 했다.

 후배의 도전은 필연이지만 이겨내기란 험난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명인 국수들이 후배의 도전을 극복 못하고 역사 뒤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 9단은 매우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대국 전후 컨디션도 좋아보였다. 최근 몇 년 우승에서 멀어진 그는 “장고 바둑 우승도 다시 일구고 싶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체력의 안배와 승부사의 마음을 새롭게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27일 전남 신안군 증도에서 구리와 대결할 10번기 4국의 전망도 훨씬 밝아졌다. 이 9단은 “지난 3국에선 승부에 집착했다. 지난해 삼성화재배 결승에서도 그랬다. 승부는 프로의 50%를 차지하지만 이젠 체력도, 즐거움도 살리는 바둑을 두겠다. 10번기는 긴 승부라 한판 한판에 묶이지 않겠다”고 했다. 여유 있는 태도는 자신감을 높인다. 이세돌과 구리의 대결은 중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결과는 한국과 중국의 바둑계에 상징적인 영향을 미친다. 바둑은 기세 싸움. 승세는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문용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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