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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대한 작가 의식이 희박해져 간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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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매달 수십 편의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말 좋은 작품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현실에 대한 작가 의식이랄까, 이런 것이 제대로 살아 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한 이유로 지적이 되겠는데요. 그런 점에서 우선 서정인씨의 『가위』 (한국 문학)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죄 없는 인간들을 무참하게 파멸시키는 비정한 소외 상황을 고발하고 있어요. 군의 동원령에 따라 입영한 사람들이 외부 세계와 일체 단절된 테두리 속에서 보잘 것 없는 식사와 힘드는 노역 때문에 망가져 가는 모습을 통해 정치적인 소외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김=저 역시 이 달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수작으로 봤습니다. 등장 인물의 이름으로 봐서는 월남 같기도 하지만 그 배경이 언제 어느 곳인가에, 대해서는 중요하지가 않아요.
다만 인간이 부당한 힘에 의해 덧없이 파괴되는 과정을 「리얼」하게 묘사함으로써 삶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느끼게 해 줍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꼭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을 좋게 보느냐, 나쁘게 보느냐는 것은 읽는 사람 개개인이 판단해야겠지요.
이=최일남씨의 『타령 다섯 마당』 (현대 문학)도 관심 있게 읽었습니다. 『가위』가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면 이 소설은 삶의 현실에 대한 삽화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5개의 「콩트」로 가난한 시장 상인들의 애환을 펼치고 있는데 그 따뜻하고 평이한 서민적 언어 표현은 바로 한국 서민 예술의 대표적 형태 가운데 하나인 판소리류의 타령을 연상케 해요. 온갖 고생 끝에 겨우 살 만하게 되니 아내를 여의게 되는 생선 장수, 아들이 학우들로부터 새우젓 냄새가 난다고 놀림을 받으니까 아들의 학우들에게 매일 껌을 사주는 새우젓 장수…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현실의 한 단면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김=최일남씨의 이 같은 새로운 시도는 계속 성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의 「스타일」로 발전할 가능성도 보입니다.
김용성씨의 『권마부행전』 (월간 중앙)도 새로운 느낌을 주는데요. 평생을 마부로 살다가 죽는 주인공을 통하여 역사의 흐름이 이 하찮은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 부각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어요.
말하자면 역사에 있어서의 개인, 개인에 있어서의 역사, 이런 문제들을 재미있게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이=김원일씨의 『농부 일기』 (한국 문학)와 오탁번씨의 『지우산』 (현대 문학)은 서로 비교되는 작품이지요. 『농부 일기』는 살인범을 사살한 순경의 아들과 그 사살된 살인범의 아들을 등장시켜 놓고 이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농도 있게 그려놓고 있어요. 『지우산』은 지성적인 여류 화가와 야성적인 남성과의 결합을 재치 있게 엮어가고 있습니다. 둘 다 호감이 가는 작품들인데 이런 류의 소설이 자칫하다가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소설이 돼버린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아요.
김=『농부 일기』는 「스타일」면에서도 매우 특이한 작품이예요. 김원일씨는 최근 들어 매우 다양한 기법을 펼쳐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이밖에 김병총씨의 『불 칼』 (문학 사상), 유현종씨의 『백성들』 (문학 사상)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불 칼』은 매우 힘들여 쓴 작품으로 「싸움」을 소재로 한 특이한 작품으로 한 독자로서 몇가지 불만이 없지 않지만 상당한 가능성이 엿보였습니다. 『백성들』은 이 작가가 즐겨 쓰는 역사 소설인데 좀더 본격적으로 다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대담>
이선영 <연대 교수·문학 평론>
김문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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