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때 끌려간 한국 명도 공|「팔산」의 고향은 합천 팔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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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구】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던 한국의 명도 공 팔산의 고향이 경남 합천군 용주면 팔산리 임이 3백80년만에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를 밝혀 낸 주인공은 일본 도자기 개척자로 유명한 고취 팔산의 11대 후손인「다까도리·세이장」(68)여사.「다까도리」여사는 그 동안 선조의 고향을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도예 연구가인 대구 산업전문학교 이경희 교장(58)등의 도움으로 고향을 찾게 된 것.
「다까도리」여사는 13일 이 교장에게 편지를 보내『11월 초 장남(47)과 함께 고향을 찾아 선조의 넋을 위로하겠다』고 전해 왔다.
그 동안 일본에서 10여 차례 개인전을 가진「다까도리」여사는 지난 73년 5월 한국을 방문, 서울 신세계 화랑에서 도예 전을 가진 바 있으며 그 당시는 팔산의 고향이 웅천 땅(경남 창원군 웅천면)인 줄 알고 그 곳을 찾아 현지주민들로부터 따뜻한 관영을 받았었다.「다까도리」여사는 현재 구주 복강현 조창군 소석원촌고에서 고취산 팔산소 라는 도자기 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다까도리야끼」의 초대 팔 산이 구주에 건너온 것은 두 번째 왜란이 일어난 1598년, 왜장 흑전 장정이 강제로 끌고 간 우리나라 도공 2백 여 명중의 한 사람으로 그 곳에서 도자기 제조를 시작, 이 때부터 일본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제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흑전 장정은 검술이나 창의 사범(지남 역)과 맞먹는 3백50섬의 녹을 주면서 차 그릇(다기)을 굽게 하고「다까도리하찌조·시게사다」라는 일본 이름을 붙여 주었다. 성 가운데「고」는 고려당에서 건너 왔다고 해서 붙여 준 것.
그의 작품은 웅장하면서도 세련, 신기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다.
「도꾸가와」때부터 명치유신 때까지는 어용도요를 지켜 왔으나 10대손「도미끼」가 아들이 없어 맏딸「다까도리」여사가 11대 가업을 이었다는 것.
팔 산은 당시 자녀의 나이가 어려 고향을 일러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그 후예들은 고향을 모른 채 살아 왔다.
이 교장이「다까도리」여사를 알게 된 것은 지난 7월. 임진왜란 당시 팔 산을 잡아간 흑전장정의 침입경로 중 팔산천라는 지명을 찾아 현지 답사한 결과를 일본 월간지『일본의 민예』8월 호에「한국 팔산리 조사보고서」란 제목으로 기고했는데 이를 읽은「다까도리」여사가 이 교장에게 편지를 보낸 데서 비롯됐다 .이 교장은 팔산리 답사 때 속칭「등미골」에서 임진왜란 때 유명한 옹기 굴이 있었음을 발견, 그곳에서 출토된 옹기조각을「다까도리」여사에게 보냈으며 선 조들이 만든 도 편과 대조한 결과 똑같은 작품임을 확인, 마침내 고향이 팔산리 임을 믿게 됐다는 것이다.
속칭「등 미골」의 옹 기굴 4백여 평 중 2백여 평은 고추밭으로 변했고 나머지는 숲으로 덮여 있으나 이 곳을 파 보니 옹기조각들이 나왔다고 이 교장은 말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구주에 끌려간 한국인 도공 2백 여 명의 후손들은 현재 40호 가량 남아 있으며 이들은 집단으로 일본정통요업을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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