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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투우」와「야성」속의 질서|【마드리드=박중희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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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투우는 오락 이상의 광신적「종교」다.
그래서「스페인」에서는 매년 적어도 1만5천 마리의 황소들이 투우사 칼에 찔려죽는다.
선사시대부터 이어 내려온 이「의식적인 살생」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승리를 상징하고 정복욕을 채우려는데 비롯됐다. 1천만을 헤아리는 이 나라 마누라들의 경우도 아마 어느 면에서는 마찬가지다.
「스페인」토속신화에 의하면 이 지상에 사는 영물의 순위는 첫째가 남자, 둘째가 소, 세째가 여자로 되어있다. 그리고 제1의 영물은 둘째 세째를 항상 정복함으로써 첫째로서의 권리와 권위를 쟁취해 왔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정복하는 것이고 정복한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스페인」은 우악스런 사내들의 세상이다.
매해 32억「달러」라는 돈을 뿌리며 이곳 인구보다 많은 3천5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그 가운데 여자가 남자보다 15%나 많다는 것도 우연한 사실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더 우연치 않은 건 불후의 명작「돈·환」이「스페인」소산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야 삼수갑산에 간들「돈·환」은 여자면 우선 정복을 해버리고 말아야 직성이 풀린다. 하느님이 정한 것이든, 인간이 만든 것이든 규범이고 무엇이고 아랑곳이 아니었다.
그건 무작정 행동부터 해놓고 생각이나 얘기는 나중에 한다는「스페인」사람의 야성적 기질의 한 단면을 잘 대표한다.
그런 기질이 여자와의 관계에서만 발휘되는게 아니라는 것은 물론이다.
예를 들어 중세기 종교재판 땐 이단자들을 불에 태우거나 끓는 기름에 튀겨버렸다. 내란 땐 양쪽이 서로 50만명을 죽였다.
무엇이든 무지스럽게 한다.
「프랑코」가 죽은지 1년, 사태가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한편 무엇인지 모를 긴장이 감돌고있는 까닭도 따져보면 우선은 그런 제 자신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건 야성적인 기질의 무절제한 발산으로 지금까지의 질서의 대들보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잠재력이 그들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스페인」사람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스페인」사람들은 아시다시피 워낙「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거든요.』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지낸 적도 있다는 공보관광성의 한 고급관리는 부끄러운 일일 것도 없다는 듯 이렇게 거침없이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인간들을 생산적인 질서 속으로 조직하고 그들에게 인권의 첫 조건인 빵과 안정과 풍요까지를 가져다 준「프랑코」치적 40년은 마땅히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측면들도 많이 가졌었다』는게 그의 긴 얘기의 골자였다.
아닌게 아니라「프랑코」는 지금도「스페인」의 많은 사람들간에「영수」「국부」라는 뜻의「카우디요」로 통한다. 그리고「쓰러진 영웅들의 계곡」에 자리잡은 그의 무덤에는 매일 생화더미가 쌓인다. 물론 성묘객의 많은 부분은 여자들이다. 그들이 표시하는 공경이「프랑코」가 역사적인 일기를 통해 이룬 일들의 긍정적인 부분을 인색치 않게 받아들이는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 성묘객들이 바치는 치성이「프랑코」에의 치하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스페인」의 사나운 사내들의 가슴 한 구석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불덩어리의「역신」을 달래는, 이를테면 고사지내는 마음도 깃 들어 있다.
또「프랑코」가 가버린 지금 그가「길러낸」젊은「카를로스」왕(39)-「수아레스」수상 (43)의 과도치하에서「스페인」사람들이 정말「돈·환」답지 않은 자제를 보이고 있다는 의의로운 현상의 까닭을 그런데서 찾아보아도 안될 건 없을 것이다.
하긴 그들의 그런 자제를 고작 자신에의 공포, 더욱이 여자들의 고사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자존에 찬「스페인」남자들에게 목덜미를 잡혀 결투장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그보다도「스페인」사람들에겐 파괴적 혼란으로부터 지키고 싶은 무엇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공평한 말일지도 모른다.
사실「스페인」이 국민총생산에서 세계 19위를 차지하는 1급 국가군에 속하게 됐고 앞으로 더 높이 오를 수 있다는 것은「스페인」사람들이 자랑삼아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빵이 생긴 것은 물론 인간다운 생활이 요구하는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낼 터전이 생겼고 그것은「보수」할만한 값어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정치적 개혁」도 약속돼 있는 처지고 그 보다도 만약 그런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스페인」남자들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바다야」가 그대로 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 자신들도 알고 있고 높은데 있는 사람들도 알고있으므로 기다려 보자는 여유를 낳고 있다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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