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15전후…평양과 서울 (5)|광복 31주년…각계 인사가 말하는 그날의 비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나는 유감스럽게도 8·15 당일 일본 천왕 유인의 항복 성명 방송을 듣지 못했다. 패전 막바지의 일본이 최후 발악으로 요시찰 인물들을 대량 학살할 것이란 소문이 돌아 평안남도와 황해도 접경의 배미라는 곳의 친척집을 찾아가 피신 중이었다. 그날 밤 평양에 다녀온 사람의 전문으로 해방 소식을 들었다. 흥분된 밤을 지내고 날이 밝자 화물 「트럭」에 편승하여 평양에 돌아왔다.
시내는 인산인해였다. 집에는 친우들의 전갈이 와 있었다. 오윤선 장로 (고 오영진씨 부친) 댁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 댁 사랑은 평시에도 이북의 민족 진영 총 본산과 같은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모두 향리인 강서에 은거 중이던 고당 조만식 선생이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조도전 대학 시절의 친구였고, 그 자리에 모였던 친우 중 전규홍 (재미·총무처장 역임) 김창덕 (남북 협상 참여)군 등은 중앙의 형편을 알아야겠다고 이튿날로 상경했다.
나는 준비 없는 해방을 맞아 치안이 혼란하니 고향인 평양의 수습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아 있었다.
17일 새벽 고당 선생이 평양에 입성했다. 그날로 건국 준비 위원회가 조직되고 명단이 발표됐다. 이 건준은 서울에서 여운형씨가 만들었던 조직과는 무관한 것으로 앞으로 중앙 정부가 수립될 때에 협력하기 위한 순수한 조직이었다.
이 건준이 백선행 기념관에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하자 곧 소련군이 진주했다. 우리는 이 붉은 군대를 2차 대전에서 전승한 연합군의 일원으로 맞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해방의 은인 붉은 군대 만세』라는 벽보와 「플래카드」를 들고 8월26일 소련군의 입성을 환영했다. 도처에서 약탈·강도·강간이 그들에 의해 자행됐지만 다발 총을 들고 떼를 지어 다니며 하는 행동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평양에서 팔뚝시계를 서너개씩 차고 다닌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가는 곳마다『젠기·다와이』 (돈 내라) 『마담·다와이』 (여자 내라)다.
해방과 동시에 가까운 사람과 조그맣게 경영하던 피혁 회사를 집어치우고 치안 활동에 협력했다. 건준안에 치안부 (자유당 때 동대문구에서 이승만 박사와 맞서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던 최능진씨가 부장)가 있었으나 갑자기 생겼기 때문에 조직이 없어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나는 내가 졸업한 숭인 상업 학교의 동창회를 비상 소집하여 「숭인 치안대 를 조직, 건준에 협력하자는 결의를 하도록 했다. 모인 사람이 약 3백명이었는데 일인이 쓰던 총검으로 무장해 치안 확보 활동에 나섰다.
평양 시내이건, 지방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폭력배가 난무하면 우리가 출동해 진압했다. 치안대가 점점 알려져 공산당이 세력을 뻗치면서부터는 제일 미움을 받은 것이 우리였고 1개월도 못 돼 무장 해제됐다.
소련군의 행패는 점점 심해졌다. 대로상에서도 차고 가던 시계를 그들에게 빼앗기기 일수였다. 나도 두어 차례 호주머니를 털렸다. 일제 말 때 파놓은 방공호 속에 여자들이 끌려들어 갔다. 은인으로 영접했는데 원수 「다와이」 군대로 변한 것이다. 이때부터 공산당은 적군을 등 뒤에 두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자위대는 소군 만행의 길잡이가 되어 동족의 피를 파는 참상을 연출했다.
세력을 넓혀 가는 공산당에 대항할 정당으로서 조선 민주당이 조직됐다. 고당 선생이 당수에 추대됐고, 나는 중앙위원 겸 청소년 부장으로 참여했다.
공산당의 핍박이 극성에 달해 고당 선생은 고려 「호텔」에 연금 됐다. 47년5월 고당 선생은 서울로 남하한 동지들에게 전갈을 보내는 한편 정세 파악을 위해 나를 「밀사」로 보냈다.
윤해균이라는 조민당 청년이 뒤따라 올라와 공산당이 나의 상경 사실을 알게 됐으니 평양에 돌아갈 생각을 말라고 전했다. 그것으로 실향이었다.
북한의 8·15 해방은 한마디로 「멍든 해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느 때나 5천만 민족이 다같이 활짝 핀 얼굴로 맞이할 수 있는 제2의 해방이 올 것인가. <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