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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즐기는 법 몰라서 … 新 여제는 추락했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나비스코 챔피언십 2라운드가 열린 지난 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 사막은 알프스 같은 느낌이 났다. 이상 한파로 해발 3300m의 샌하신토산은 눈을 뒤집어쓴 채 설경을 뽐냈다. 푸른 잔디와 야자수가 널린 골프 코스와 이를 둘러싼 사막, 뒤로는 눈 쌓인 봉우리가 이국적 느낌이 났다. 대만 선수 청야니(25)는 대회를 앞두고 “이 아름다운 곳에서 우승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경기 중 경치를 볼 여유가 없었다. 2라운드까지 7오버파를 쳐 컷탈락한 청야니는 한 조로 경기한 최나연과 의례적인 포옹을 한 후 깊은 한숨을 쉬고는 그린을 빠져나갔다.

 12일(한국시간) 현재 청야니의 세계랭킹은 46위다. 2년 전 청야니는 독보적인 1위였다. 당시 청야니와 2위 최나연의 랭킹 판정 포인트 차이는 최나연과 랭킹 180위 선수의 차보다 컸다.

 2년 전의 나비스코 챔피언십이 청야니에겐 최고점을 찍고 내려오는 터닝포인트였다. 김인경이 마지막 홀에서 짧은 우승 퍼트를 놓친 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유선영이 연장 끝에 포피의 연못에 뛰어들던 바로 그때다. 청야니는 직전 대회인 기아 클래식을 비롯해 2012년 참가한 5개 대회에서 3승을 거두는 파죽의 지세로 팜스프링스에 왔다. 청야니는 1, 2라운드 4언더파씩을 치면서 선두로 올라섰고 마지막 날 챔피언조에서 우승 경쟁을 했다.

 4라운드에서 3퍼트와 아이언 실수가 자꾸 나오면서 뒤로 밀렸다. 그래도 청야니는 ‘여제’였고 기회는 있었다. 특유의 장타를 이용해 파 5인 마지막 홀에서 2온에 성공해 이글 기회를 잡았다. 서희경이 4연속 보기를 한 터라 청야니의 이글이 들어갔다면 연장전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볼은 살짝 홀을 빗겨나갔고 청야니는 아쉬움에 뒤로 벌렁 누웠다.

 그는 포피의 호수 옆에 있는 18번 홀 그린에 자빠진 후 2년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한 번도 우승이 없다. 청야니는 “그해 6월 숍라이트 클래식에서도 톱 10에 들지 못했는데 다들 ‘청야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냐’라고 수군거렸고, 그래서 내 자신이 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해 여름 청야니는 78타라는 프로답지 않은 스코어를 기록했고, 캠프 내에선 파열음이 자주 나왔다. 청야니와 환상의 팀워크라고 평가되던 캐디 제이슨 해밀턴이 해고됐고 스윙 코치, 심리 코치, 에이전트 등이 다 바뀌었다.

늦잠 자다 지각 ? 경기 출전 못해
가을 이후 청야니는 어느 정도 회복했다. 한국에서 열린 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3위도 했다. 그는 “내가 다시 돌아왔다”고 큰소리쳤다. 그래도 우승은 못 했고 2013년 3월 기아 클래식 프로암에서 늦잠을 자 지각하면서 경기 출전을 못 하는 해프닝이 생겼다. 또 8월 열린 세이프웨이 클래식에서는 우승을 눈앞에 뒀다가 79타를 치며 수잔 페테르센에게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했다. 지난가을 탈장수술을 했고 아시아에서 열린 LPGA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청야니는 최근 “예전에는 페어웨이가 넓고 짧아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다”라는 농담도 했다. 부진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계랭킹 1위에 대한 부담이 컸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너무 높았고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다 스스로 압박감을 만들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 나에 대한 관심이 줄고 그만큼 부담도 줄었으니 다시 올라가겠다. 지난 몇 년간 많은 것을 배웠다. 내 목표는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지난 2년간 청야니는 이런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믿기 어려워졌다. 우화와 달리 LPGA를 호령하던 청야니는 다시 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재능이 뛰어난 청야니가 지금처럼 지지부진하지는 않겠지만 다시 여제 자리에 올라가기에는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청야니가 말로만 1등 복귀를 외치는 것은 아니다. 청야니와 같은 코치를 두고 있는 최나연은 “야니가 열심히 하고 샷도 많이 좋아진 것 같더라”라고 했다. 청야니는 “이제 연습장에서는 잘 되니까 이를 코스로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도 쉽지는 않다. 경기장에서 지고 싶어 하는 운동선수는 없다. 그래서 열심히 뛴다. 그러나 그중 절반은 진다. 이기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더 강력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 지난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 선수들이 대충대충 한 것은 아니지만 성적은 별로였다. 한국 야구는 병역 문제가 걸린 선수가 많았던 2008년 올림픽 등에서 성적이 좋았다. 이기고 싶다는 것 이상의 플러스 알파의 동기가 있었다.

 메이저에서 유달리 강했던 청야니는 나비스코까지 4연속 메이저 컷탈락을 기록했다. 메이저대회는 코스가 어려워 많이 참아야 한다. 청야니가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는 모습도 더러 보인다.

신지애도 정상 오른 뒤 흔들려
청야니 가슴속에 활활 타던 불꽃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정상의 운동선수로서 필요한 초인적인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도 정상에 있을 때 야구로 외도를 하기도 하고 여러 번 은퇴를 했다가 코트로 돌아왔다. 팀 스포츠와 달리 골프는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 다른 스포츠에선 체력 때문에 정상에 있는 기간이 짧지만 골프는 거의 무제한이다.

 청야니는 샷이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랭킹 1위가 부담스럽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남자 골프 랭킹 1위를 했던 루크 도널드도, 로리 매킬로이도 “랭킹 1위라는 부담감이 없으면 경기가 더 편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최고 자리에 있는 것이 힘들다고 느끼는 건 최고가 되겠다는 욕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바람대로 오랫동안 1위에 머물지 못했다. 최고가 되고 싶다면 수많은 경쟁자의 도전도, 미디어와 팬들의 주목도 견디고 즐겨야 한다.

 신지애가 LPGA를 떠난 것도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다. 상금왕과 랭킹 1위를 했던 신지애는 ‘다 이루었다’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최고가 되겠다는 가슴속의 불꽃이 사라진 것이다. 메이저리그인 LPGA 투어가 부담스러워졌다면 경쟁 자체가 힘들고, 아무리 쉬운 리그에서도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 이기기 어렵다.

 골프에서 오랜 기간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선수들이 있다. 타이거 우즈는 1997년부터 2009년까지 12년간 골프 황제로 지냈다. 예전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랭킹 1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1위를 즐긴다. 안니카 소렌스탐은 95년부터 2006년까지 최고 선수였다. 이혼 소송을 하던 2004년에도 8승을 했다. 그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한 샷 한 샷에 집중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벤 호건도 41세에 호건슬램(1년에 참가한 3개 메이저에서 모두 우승)을 달성했고, 샘 스니드는 50대까지 젊은이들에게 뒤지지 않는 의욕을 보였다. 잭 니클라우스는 첫 메이저 우승과 마지막 메이저 우승의 시간 차이가 24년이 된다. 그 기간 동안 마음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았다.

 너무 어릴 때 시작된 스파르타 훈련이 롱런을 어렵게 한다는 해석도 있다. 미국 타이틀리스트 퍼포먼스 인스티튜트의 그레그 로즈 박사는 “내가 상담한 한국 선수 몇몇은 골프가 자신의 청소년기를 빼앗아갔다고 여기며 (부모님의 울타리를 벗어나)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골프를 그만두겠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청야니 마음 깊은 곳에도 이런 생각이 자리했을지 모른다.

랜초미라지(미 캘리포니아)=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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