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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선거 표에 도움 안 되니 정책 순위 밀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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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훈육이라는 이름의 체벌, 가정폭력에 관대한 정서와 주변의 무관심, 허술한 아동보호체계와 예산·인력 부족 등 우리 사회 전반의 아동보호에 대한 인식과 제도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했다.”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는 계모 박모(41)씨에게 울산지법 형사3부(재판장 정계선 부장판사) 판결문의 일부다. 한국의 아동학대 예방시스템의 문제점이 요약돼 있다. 여기에다 아동학대에 대한 경찰·검찰·법원의 무지,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부모의 잘못된 인식이 한몫한다. 국회와 지자체도 이 문제에 무신경 하다. 이런 허점 때문에 경기도 남양주시의 미혼모(22)가 22개월 된 아들이 계속 운다는 이유로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지난달 24일 또 발생했다. 2001~2012년 학대로 인해 숨진 아동이 97명에 달한다(전국아동학대현황 보고서).

 아동보호체계의 핵심은 전국 50개의 아동보호기관이다. 그런데 울산 사건 때도, 이번 칠곡 사건에도 아동보호기관이 무기력증을 드러냈다. 울산지법은 판결문에서 “당시 피해자의 유치원 교사가 학대를 의심해 포항아동보호전문기관에 신고했는데, 이때 제대로 대처했다면 극단적 결과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크다”고 지적했다. 칠곡 사건을 담당한 경북 구미아동보호기관은 부모에게서 아이를 격리하거나 부모를 고발하지 않았다. 또 학대자 앞에서 아이가 진실을 말하기 힘든 점, 학대자의 이중 심리 등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동보호기관이 학대자를 고소·고발한 경우는 6.6%(2012년)에 불과하다.

 경찰·검찰의 무지도 일을 키운다. 2012년 법무부 조사 자료에 따르면 아플 때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 의료방임 행위가 학대에 해당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경찰은 44.7%, 검사는 45.1%, 판사는 43.4%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일반인(90%)의 절반에 불과하다. 칠곡 사건의 경우 숨진 아이의 언니가 관할 지구대에 신고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부는 이런 문제점을 보완한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9월부터 시행한다. 경찰이 학대자와 아이를 격리하거나 아동보호기관 등이 친권제한 신청을 할 수 있는 장치가 포함돼 있다.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상용 교수는 “아동학대 사건은 초기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실무자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동학대 예방은 큰 사건이 날 때 관심을 받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새누리당이 11일 당정협의에서 아동보호기관 중앙관리시스템 구축, 아동보호 예산 확보, 아동학대 근절 태스크포스(TF) 구성,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 5000명 증원 등을 내놨지만 ‘뒷북 대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지자체에서 아동보호 정책은 우선순위가 밀려 있다. 아동보호기관이 50곳뿐인 이유도 지자체의 무관심 때문이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아동은 표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라며 “아동학대 예방사업을 중앙정부 관할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아동보호기관 확대와 종사자 교육, 피해 아동 보호 지원, 부모 교육, 아동 학대치사 양형기준(최장 9년) 상향 등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아동보호 예산은 올해 중앙정부 11억6000만원, 지자체(2013년) 125억원이다. 한 해 복지예산의 0.01%에 불과하다.

신성식 선임기자, 권호·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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