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글 달래고 으르고 … 시진핑·군 '분업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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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 중국 총리(가운데)가 토니 애벗 호주 총리(왼쪽), 정홍원 국무총리와 함께 10일 보아오 포럼 개막식장에 박수를 치며 들어서고 있다. 리 총리는 기조연설에서 “남중국해의 평화·안정은 중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 공통의 이익에 부합한다”며 “이를 깨뜨리는 도발행위에 과감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아오 로이터=뉴스1]
헤이글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으르고 달래는 외교 행보를 선보였다. 창완취안(常萬全) 국방부장이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 면전에서 ‘전쟁 불사’까지 외치며 강경한 모습을 보인 다음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군사 협력’을 거론하며 우호적 제스처를 취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할 말은 하면서도 대결로 치닫지는 않으려는 전략이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9일 헤이글 장관을 만나 “군사 관계는 중·미 양국 관계의 중요한 부분이며 서로 신형 대국 관계의 틀 안에서 새로운 모델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콩 명보(明報)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의 국가 정상이 2012년 이후 상대국 국방장관을 만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시 주석과 헤이글 장관의 만남은 이례적이다. 시 주석은 이어 “지난해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상호 존중하고 협력하며 서로 이익이 되는 신형 대국 관계 구축에 합의했다. 서로 대립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민감한 문제나 이견에 대해서는 협력을 통해 해결하자”고 말했다. 헤이글 장관도 “21세기 세계에서 많은 국제 문제가 미·중 양국 관계의 발전에 달려 있고 미국은 중국과 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고 군사 관계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날의 우호적 분위기는 전날의 험악한 분위기와 대조된다. 헤이글 장관은 8일 창완취안 국방부장과의 회담을 마치고 한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방공 식별 구역 선포는 주변국과의 갈등 위험이 있다” “미국은 중·일 영토 분쟁 시 동맹국인 일본을 보호할 것”이라며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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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중국 측도 거세게 반발했다. 창 부장은 “중국은 영토 수호를 위해 필요하다면 군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고 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중국군 수뇌부가 미 국방장관 면전에서 ‘전쟁’을 거론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판창룽(范長龍)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도 이날 헤이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국방장관 회의와 일본 정치인들과의 만남에서 한 당신의 발언은 거칠고 결연했다. 나를 포함한 중국인들은 매우 실망했다”고 비판했다. 중국에 (주변국) 영유권을 침범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추진 노력을 지지한다는 헤이글 장관의 발언에 대한 경고였다. 이어 “나는 당신의 최근 (중·일)순방과 발언에 대해 특별히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압박했다.

 중국은 앞서 7일 헤이글 장관을 칭다오(靑島) 해군기지로 초청해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의 유일한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함을 2시간가량 둘러보게 했다. 중국 언론은 중국이 미국과의 신형 군사 관계 구축을 위해 최고의 환대를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이 항모 공개로 환대했으나 헤이글 장관이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자 중국군 수뇌부가 경고와 압박을 한 뒤 시 주석이 달래는 역할 분담까지 한 셈이다. 홍콩의 군사 평론가 루롄(陸蓮)은 “중국은 미국에 대한 불만을 강온 외교 전술을 구사해 헤이글 장관에게 표출한 것이며 이는 향후 미·중 신형 군사 관계 구축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의도적인 행보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리커창(李克强) 총리도 파격 외교를 구사했다. 그는 9일 오후 하이난다오(海南島) 보아오(博鰲) 포럼에 참석한 토니 애벗 호주 총리에 대한 환영식이 끝나고 사열대 밑에서 애벗 총리를 붙잡았다. 양국 정상 회담장으로 이동하려던 애벗 총리가 깜짝 놀라자 리 총리는 실종된 말레이시아 항공기 수색 상황을 물었다. 정상 외교에서 볼 수 없는 결례다. 특히 환영식에 이어 예정된 양국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는 안건으로 올라가 있었다. 애벗 총리는 현장에서 지금까지 수색 상황을 얘기했고, 리 총리는 감사의 뜻을 표했다. 5분 가량 진행된 두 정상의 대화 내용은 리 총리가 공개하면서 언론에 보도됐다. 리 총리의 행보는 중국인 154명이 탑승했던 실종 여객기에 대한 국가 지도부의 관심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한 계산된 결례로 분석된다.

베이징=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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