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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48> 외씨버선길 '김주영객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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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에는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지명에도 ‘소나무 송(松)’ 자를 쓴다. 김주영객주길 4㎞ 지점에 있는 수정사 앞 소나무 산책로.

외씨버선길은 경북 청송군?영양군ㆍ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을 지난다. 청송 주왕산 입구부터 영월 관풍헌까지 모두 13개 코스(200㎞)로 구성했고, 연결 구간(40㎞)까지 합하면 240㎞나 된다. 이 중 청송에 난 셋째 길 ‘김주영객주길’을 걸었다. 청송 진보면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김주영(75)씨와 그의 소설 『객주』를 합해 이름 붙인 길이다. 마침 지난달 25일 진보면에 객주문학관이 준공됐다는 소식이 들려와 청송으로 내려갔고, 문학관에서 작가를 만났다. 김주영은 자신이 어린 시절 보고 느꼈던 진보 오일장의 풍경을 토대로 조선 후기 보부상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객주』를 썼다. 15.6㎞에 이르는 길은 소박한 인생과 맞닿아 있었다. 100여 년 전에는 전국을 떠돌던 장돌뱅이의 한 많은 삶을, 지금은 야산을 일궈 고추ㆍ사과를 키우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사과 과수원 사이로 난 김주영객주길. 농사를 막 시작한 사과농장은 한산했다. 5월이 되면 하얀 사과꽃이 만발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소설 『객주』 속으로

지난달 26일 오후 3시30분 진보행 버스에 올랐다. 대중교통으로 서울에서 청송으로 가려면 군청 소재지인 청송읍보다 진보면으로 가는 것이 더 용이하다. 각각 영양과 영덕으로 가는 버스가 진보를 거치기 때문에 차편이 곱절 많다.

 버스에서 『객주』 1권을 읽었다. 문경에서 안동을 거쳐 진보로 향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안동에서 승객이 우르르 내렸고 버스에 남은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다. 안동 시내를 빠져 나오자 사위가 어둑해졌다. 책을 덮고 창밖을 봤다. 산세는 험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로 뻗친 산줄기가 끝이 안 보이도록 이어졌다.

 버스가 안동시 임동면에 있는 임동교를 빠르게 건넜다. 이 부근에 있는 가랫재는 임동면과 청송 진보면 추현리를 잇는 고개다. 소설 속 주인공도 가랫재를 넘어 진보에 들었다. 어설픈 짚신을 신고 숨을 할딱대며 지났을 길을 버스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단 몇 분 만에 통과했다.

 그렇게 『객주』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짙게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새벽녘 나귀 세 마리를 끌고 길을 헤쳐나가는 ‘천봉삼’ 일행이 또렷이 떠올랐다.

 이튿날 아침 객주문학관에서 김주영 작가를 만났다. “장이 서지 않는 날 진보는 마치 바다 속 같았어요.” 올해 일흔다섯 살이 된 소설가는 60년 전 진보의 모습을 마치 어제 일처럼 술술 풀어냈다.

 그는 “오지에서 자랐기 때문에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소설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말마따나 진보는 내륙 깊숙이 위치한 오지다. 그 옛날 고향 마을과 바깥 세상을 이어준 것은 하루에 한 번 다니던 버스(진보~안동)가 전부였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엔 그마저도 없었다. 눈이 녹을 때까지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장날에는 아침부터 동네 공기가 묘했어요. 새벽녘 안개를 뚫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당나귀에 짐을 실은 사람, 소 열 마리를 끌고 오는 사람, 등에 봇짐을 짊어진 사람이 저 멀리서 오는 거예요.”

 안동·영덕·의성·대구·고령·영양 등 각지에서 온 장사꾼은 시장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가져온 물건을 진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끝자리가 3, 8로 끝나는 날 진보 오일장이 열린다.

 김주영 작가는 장날이면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고 학교를 빠졌다. 나중에는 장날에 정말 배가 아팠더랬다. “거짓말이 참말이 된 거야.”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때 느꼈던 시장 모습과 분위기가 지금도 눈에 선해.” 어린 날에 지켜본 장돌뱅이의 삶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1979년 서울신문에 『객주』 연재를 시작했고 84년 9권짜리 대하소설로 묶어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완결편인 10권을 내놨다.

 지금 진보 오일장의 정식 이름은 진보전통시장이다. 100여 개 점포가 매일 장사를 하고, 장날에는 그보다 두 배 많은 점포가 선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장의 이름·시설·풍경 모든 것이 바뀌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동네 어르신들이 내가 지나가면 ‘야, 니 주영이 아이가’하면서 말을 걸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 다들 돌아가셔서. 어쩌겠어. 세월이 흐르는 것을.” 작가의 말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김주영 육필원고.

길 따라 장돌뱅이 따라

일부러 장날을 골라 걸었다. 지난달 28일 오전 9시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마을 초입에서 홍영숙(55) 문화해설사를 만났다.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신기리느티나무(천연기념물 192호)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날은 달랐다. 액막이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일이 꼬인 것 같다고 한탄하는 『객주』 속 ‘최돌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장돌뱅이라도 된 양 무탈하게 길을 걷게 해달라고 빌었다.

 사과의 고장답게 마을 곳곳에 사과나무가 있었지만 아직은 앙상한 모습이었다. 6월이 돼야 열매가 생기고 10월께 수확한단다. 마을을 가로지른 길은 뒷산으로 이어졌다. 소나무 잎이 자박하게 밟혔다.

 “지역 주민이 돌을 골라 길을 냈어요.” 홍영숙 해설사가 말했다. 돌을 치운 곳에 자연적으로 이끼가 자라났다. 물기를 머금은 이끼의 보드라운 감촉이 두 발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어린 벚나무가 늘어서 있는 야트막한 산 능선을 지나자 수정사 안내 팻말이 보였다. 수정사는 고려 보장왕(1352~1374) 때 나옹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두메산골에 들어앉은 절간은 화려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았다.

 안내 팻말이 서 있는 자리부터 절까지 이어진 250m 길이의 산책로는 예뻤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양 옆으로 늘어서 적당한 그늘을 내줬고 나무 사이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청송은 임야가 전체 면적의 82%를 차지한다. 소나무가 가장 많단다. 청송(靑松)이라는 지명에 ‘소나무 송(松)’ 자를 쓰는 이유다.

 비봉산(671m)에 들어서면서부터 진보면이었다. 비봉산에 난 길은 실제로 옛날에 장꾼들이 우마차를 끌고 다니던 길이었다. 바퀴가 지나간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어린 쑥과 냉이만 가득했다. 산골짜기 깊숙이 들어갈수록 길이 좁아졌다. 바짝 마른 상수리나무 잎이 발에 짓이겨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만개한 노루귀가 바람에 흔들렸다. 청송에서 본 유일한 꽃이었다. 올해 봄꽃은 예년보다 2주일이나 빠르다는데 청송의 봄은 아직 이른 듯했다.

 ‘너븐삼거리’를 지나 메산 정상에 도착했다. 여기서 왼편으로 2㎞쯤 가면 객주문학관과 진보 오일장이 나온다. 길을 다 걷고 난 뒤 시장을 둘러보기로 하고 원래 코스인 오른쪽 길을 계속 걸어나갔다. 김주영객주길의 난이도는 ‘중’이다. 여러 갈래로 뻗은 비봉산 줄기를 오르내렸다. 개중에 경사가 무척 심한 구간도 있었다. 봇짐이며 머릿짐을 지고 산을 넘었을 장돌뱅이를 생각하며 무던히 길을 재촉했다.

 마을 풍경은 어딜 가나 비슷했다. 야산을 개간해 사과·고추·인삼을 기르고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담배 농사가 흥했었는데 기후가 바뀐 탓에 이제는 인삼밭이 더 많다. 영양·영덕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월전 삼거리를 지나 언덕 두어 개를 더 넘어 종착점인 고현지에 도착했다.

 길을 다 걷고서 진보 오일장에 들어갔다. “이 근방인데.” 홍영숙 해설사가 기웃거리자 옷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맞다. 여기가 거기다”고 말했다. 옷가지가 걸린 담장 너머로 김주영 작가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담 바깥쪽은 장사꾼 차지였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길 정보

외씨버선길(beosun.com) 셋째 길 김주영객주길은 파천면 신기리에서 시작해 진보면 고현리에서 끝난다. 흙길과 임도가 반반 섞여 있어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15.6㎞를 완주하는데 넉넉잡아 6시간이 걸린다. 길 중간에 식당이 없다. 식사와 물을 꼭 준비해야 한다. ㈔경북북부연구원(054-683-0031)이 외씨버선길 전체 구간을 관리한다. 진보면 진안리에 있는 객주 문학관은 지난달 25일 준공했다. 정식 개관은 6월 9일 예정인데 지금 가도 문학관을 둘러볼 수 있다. 김주영 작가의 육필 원고와 개인 수집품, 조선 후기 보부상에 대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청송군 문화관광과 객주테마 추진팀(054-870-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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